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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아 May 23. 2024

14. 현실이 뭔데, 그냥 꿈속에서 살면 안 돼?

견디는 삶은 그리 숭고하지 않아요.

14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와보니 친구들 사이에서는 우리 부부의 '로또 당첨설'이 심심찮게 돌고 있었다. 그저 웃으며 넘긴 이야긴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로또에 당첨되면 영위하고 싶은 삶의 모습이 이런 건가? 월화수목금퇼의 삶이 아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를 넘나들며 여행하는 삶. 꿈꾸는 삶이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삶은 아닌가 보다-하는 생각. 물론 이 큰 우주의 아주 쬐끄만한 존재인 내 머릿속에서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일반화, 결론이지만 그 김에 해본 이런저런 생각 끝의 내 결론은 그랬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이런 거였나 보다.



바라는 삶이 그리 거창하지도 않다. 그냥 집에서 캔버스 끄적일 여유만 있으면 된다.



한국에서 비싼 거 먹고 비싼 거 사 입는 삶 말고, 다양한 풍경과 사람들이 낯설게 흥미로운 나라들을 돌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살아보는 삶. 쭉 그렇게 살겠다 마음먹으면 아마 경제적으로 아주 풍요로운 삶과는 멀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택시비 아끼려 좀 더 걷고, 메뉴에서 가격 고민하며 주문하고, 맘에 드는 예쁜 옷이 있어도 옷장 몇 번을 뒤적이며 결국은 마음에서 내려놓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빠와 함께라면 더 걷는 길에 나누는 재밌는 대화가 있을 것이고, 메뉴 고민하다 옛다-하며 지르는 가끔의 비싼 요리가 추억이 될 거고, 거적때기도 멋스럽게 걸쳐주는 오빠의 센스가 가미되면 쿨한 패션 완성일 거다. 그래서 할 만하겠다 싶었다. 그렇게 바람처럼 떠나서 이리저리 살다가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삶.



사실. 요 근처로 불어가도 좋고, 내 근처로 바람이 불어와도 족하다. 미술관엘 가는 일 내 공간에 꽃을 들이는 일이 뭐 그런거지.



나 스스로도 이런 생각은 '꿈'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꿈꾸는 삶은 그런 삶이라고. 그 말 안에는 이뤄지기 어려운 미래에 대한 소망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신랑이 아니었다면 이런 꿈을 그저 말로 풀어볼 때에도 혹시 나를 철부지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눈치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대화의 끝에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실제적인 고민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둘이 함께라면 어디서는 굶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아주 작은 것에도 까르르하며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내가 그리며 소망했던 그 미래는 꿈일까, 현실일까? 나 조차도 꿈이라고 말해왔지만, 우리 안에서는 현실일 수 있는 이야기다.



정말 집 앞으로도 짐 싸서 떠날 수 있는 삶.




현실



한국으로 돌아와 부부로또설을 맞이하며 시작한 새로운 나날들.

일단 현재 둘 다 백수다. 게다가 나는 모아 놓은 돈의 대부분을 결혼식과 신혼여행에 쓴 상태였다. 발리와 일본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단 몇 달이라도 더 마음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 있었겠지만, 이미 다녀왔기에 경제적 시한부나 다름없었다. 불안했다. 토스 어플을 하루에 2번은 들어가서 체크했다. 지금 나에게 잔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 후 손가락을 접어가며, 내가 마음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는 게 몇 달이나 남았는지를 확인했다. 그날의 끝이 정해지니 가장 불안했던 건, 그때에 가서 재취업 준비를 해도 마음처럼 빨리 취업이 안되면 어쩌지 하는 것이었다. 하루에 2번 토스어플 켜기와 구인구직 어플 켜기가 루틴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오고 정확하게 한 달만에 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준비를 마친 나의 이력서는 약 4곳에 전해졌고, 나는 그중 한 곳에 입사했다. 일본 여행을 1월 말에 다녀왔으니 입사한 3월 중순까지 취업하는 데에 한 달 반 정도 걸린 것이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원했던 속도대로 입사에 성공했으니 행운이 따랐다고도 할 수 있었다. 잡 인터뷰를 하는 날이 기억난다. 나는 그때 조금 허풍을 섞자면, 회사까지 바래다준 오빠의 차에서 내리는 내내 도축장 끌려가는 소의 마음이었는데, 인터뷰를 시작하니 이상하게도 명치에서부터 뭔가 막 꼿꼿해지는 힘이 느껴지면서 눈이 반짝이게 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살짝 을의 입장으로 긴장감 가득했던 지난날의 인터뷰와는 다르게 '나는 여기 아니어도 상관없어. 이곳이 나랑 잘 맞는지 나도 살펴보는 과정일 뿐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해서 하루에 두 번씩 토스어플 켜던 쫄보는 어디 가고 갑자기 이런 애가 어디서 나온 거지?





이런,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 모르겠는 두둑한 배짱. 이건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이라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추측 건데 혼자가 아닌 둘이라 가질 수 있는 배포인 것 같다. 망해도 혼자가 아니라는 거. 속상한 일이 있어도 집에 가면 토닥여줄 신랑이 있다는 거. 이게 생각보다 내 삶에 끼친 영향은 정말 컸다. 그런 배짱 덕분에 나는 내가 할 말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입사 조건을 잘 조율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업무 2달 차인 지금 아주 다양한 문제를 직면하며 사투를 벌이는 직장인이지만 시작부터 구김 없이 당당했던 내 자세 덕분에 나쁘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일은 지인짜 많다.. 나 일복 필요 없는데 타고난 것 같다.. 나 워커홀릭 하기 싫은데 자꾸 그렇게 된다. 입사 일 주 일 차 때부터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오빠가 그랬다 그래서 가슴에 사직서 하나씩 품고 다니는 게 회사라고. 여차하면 때려치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버티는 거. 그렇게 하루를, 이틀을, 일주일을, 한 달을 견디는 삶.



악착같이, 틈만나면 어디든 다니고 뭐라도 보려고 애쓰는거 지친다.



너무 싫다. 견디는 삶이라니.

내가 당장 이따가 퇴근하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내 삶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건데 뭐 때문에 지금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가. 미래를 위해 견디는 삶을 사는 건 적어도 내게 전혀 숭고한 삶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보람 있게 살면 일주일이 행복하고, 그 일주일이 모이면 한 달이 그렇고, 그렇게 모으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다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회사 생활에서 내가 '견뎌야'하는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갈 생각이다. 내가 뭔가를 견딘다면 '큰 거 하나'를 위한 잠깐의 전략일 것이다. 회사와의 전략적인 거래를 위해 ENFP 중 F가 90%를 넘는 나이지만, T가 90%이라고 말해놨다. 그게 뭐냐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리고 약간 씁쓸하지만 꽤나 좋은 방패가 되어주고 있다. 그전에는 내 말을 혹시나 곡해해서 들을까 마음 졸였지만 T성향을 가진 사람이라 말해놓으니 경제적으로 짧게 요점만 말해도 성의 없게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똑 부러진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지금까지 나 뭐 하며 산건가 싶어 씁쓸했지만 괜찮다. 앞으로의 내가 편하면 된다.



우리 대장이랑도 여행가면 좋겠다. 해외 여행 한 번 못해본 우리 13살 막내.



바람처럼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삶에서 중요한 건 '여행'. 바로 시공간에 자유로운 일을 메인 잡으로 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경력을 쌓아야 했고, 그 경력에서 목표한 1년 반을 이곳에서 보내겠다 마음먹고 들어왔다. 그 1년 반동안 나는 참지 않을 것이다. 견디지도 않을 것이다. 당장 내일 죽어도 오늘까지 행복했다 마음 놓고 눈감을 수 있는 삶을 살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싸운다. 회사와. 치열해도 괜찮다. 집에 가면 오빠가 있으니까. 같이 맛있는 저녁 만들어 먹고, 크록스 홀짝이며 신고 나가 초여름 바람도 쐬고, 렉카 유튜브 보며 뻥이요를 아작아작 먹는 여가시간을 보내면 그로써 하루가 완벽해지니까.



이 중에서 오빠가 만든 요리가 숨겨져있다. 알아 맞춰 보시오-



아, 맞다.
신랑의 항공사 마일리지로
올해 연말엔 어디로 떠날까
고민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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