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첫걸음, 그것은 바로 비행기 놓치기.
결혼식을 끝낸 바로 그다음 날 오후 1시.
가공할 만한 능력의 P인 우리 둘은, 차라리 푹 자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기로 했다. 늦잠만 안 자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었기에 제 시각에 일어나 상쾌하게 맞이한 아침이었다. 가서 해도 되지만 혹 남아있다면 창가 쪽 자리를 선택하고 싶어 온라인 체크인 서비스에 접속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보딩 시각이 너무 이른 것이었다. 몇 번이고 새로고침을 눌러도 똑같았다. 4시 비행기가 2시 비행기가 되어있는 것이었다.
오빠, 우리 비행기가 2시간 앞당겨졌는데?
느긋하게 짐을 챙겼는데도, 부피와 남은 시간 면에서 아주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기에 평화롭게 커피를 내리고 있던 나에게는 눈이 질끈 감게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 당장 출발해도 2시가 넘을 것이기에 비행기를 놓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렇지만 일단 공항에 가야 뭐든 간에 조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빠르게 택시를 잡아탔다.
아니, 결제 내용은 다양한 채널로 공지하면서
비행기 스케줄 바뀐 건 메일 하나 달랑 보내고 끝이라니요?
일단 항공사에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했더니 우리가 가려는 여정 중 전쟁국가의 상공을 지나게 되어, 경로를 바꾸느라 비행 스케줄에 변동이 있었고, 3개월 전인 6월에 이메일을 보내 공지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안 그래도 결혼식과 신혼여행 관련 메일은 꿈에도 나올 정도로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 중요한 메일을 못 봤다니! 심지어 나는 이메일을 아예 삭제하지도 않는다고!! 그러나 그런 항변은 무의미했다. 바로 같은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친구는 그 여행이 신혼여행이라는 점을 강조해 부탁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몇 차례의 통화 끝에 수수료 없이 다음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조치를 받았고 그래서 결국 계획보다 하루 늦게 포르투갈에 도착하는 일정이 되었다.
호텔 1박을 날리고 경유지가 된 밀란의 호텔 1박을 추가로 예약하여 지불해야 하는 상황도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억울했다.
세상에 메일을 열심히 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심지어 나는 절대로 못 본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메일이 누락되었을 가능성은 없는지를 물었을 때, 상담직원분은 다행히도(?) 솔직히 없지는 않다고 말씀하셨다. 카톡 알림, 문자메시지 등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채널이 분명 있는데 달랑 메일 한 통이라니. 기가 찼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온몸에 열이 났고 얼굴도 새빨개졌지만, 이성을 찾아야 방법이 생길 것 같아 정신을 붙들어 맸다. 죄 없는 분에게 최대한 감정적인 언사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다짐을 정수리에서 엄지발가락 끝까지 새기고, 상의에 상의를 거듭했다. 결국 불확실하지만 밀란에 도착해서 현지 직원과 상의해 보라는 답변을 받았다. 날린 1박 호텔비는 차치하고, 하루 묵을 곳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혹시나 내가 진상이 되는 것인가 하는 걱정에 '어디까지나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었다. 연락이 누락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온라인 체크인을 미리 했으면 알게 될 상황인데 그걸 안 해서 몰랐으니 회사 책임이 아니라고 말씀한 직원 분 때문이었다. '온라인 체크인, 그건 옵션이라고! 필수가 아니라.' 나는 곧바로 다른 직원 분과 상담하고 싶다고 했다. 그다음 직원분은 훨씬 침착하고 노련했고, 무엇보다 내 당황스러운 마음을 이해해 주셨다. 최선의 방법을 찾을 뿐, 누구에게도 누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마음.
불편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남은 시간이라도 평화로울 수 있게 근처에 호텔을 준비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눈 좀 붙이고 비행하시길 바랍니다.
밀란에 도착하니, 당황스러워 달궈졌던 몸과 마음이 선선하게 식었다. 까마득한 밤이었고, 포르투갈에 도착할 비행기는 5시간 뒤에 이륙한다. 밀란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나오니 말끔한 차림의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 직원분이 서 계셨다. 거기서부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너무 죄송했다. 내 소중한 신혼여행 지키고자 나는 저분의 밤잠을 빼앗았구나.
사람 일 별거 아니다. 말 한마디면 되는 것이다. 처음에 나와 통화한 상담 직원분도, 실제 뭔가를 해주지 않더라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가능한 방법이 없습니다.' 정도면 되었을 것이다. 그저 추가금을 내고 다른 편의 비행기를 예약하면 될 일이니까. 처음으로 떠나는 유럽 여행이고, 신혼여행이었기에 조금은 불안하고 무서웠던 게 행복으로 가리어져 있었다. 그것이 건드려진 것이었다.
차분하고 정중한 한 마디에, 미안함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제야 내 옆에 있던 새신랑도 미소를 되찾았다.
그런데, 나의 신랑은 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수화기를 나에게 넘겼는가.
내가 뜨겁게 당황해 감을 스스로 느끼면서 '참, 의지할 곳이 없네.'라는 마음을 느꼈다.
분명히 나에게는 6살이나 많은 신랑이 옆에 있는데, 나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황 파악에서부터 문의처를 알아보고, 실제로 어떤 내용으로 문의를 할지, 요청할 것은 무엇일지 등등. 불안한 감정과 맞서는 순간에도 나는 그저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오빠', '신랑'은 없었다. 원망스러웠다.
오빠가 좀 도와주지. 못된 말 내뱉고 있는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속상한데, 그 짐 좀 같이 나눠주지. 나보다 여행 많이 다녀봤잖아, 오빠는.
목이 메어와 꿀렁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뱉어낸 말에 오빠는 대답했다.
머리가 멈췄었어. 그래서 나 나름대로 근아가 그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래도 미안해. 나는 회사 다닐 때 이런 일을 어쩔 수 없이 도맡아 해왔지만, 사실 정말 못하겠고 곤욕스러운 일이야. 그걸 근아가 해주니까 너무 미안하고 고맙네.
그 말을 들으니 문득 떠올랐다.
내가 서서 이야기하지 않도록, 찬기 서린 돌 벤치 대신 나무로 된 벤치를 찾아 앉혀주던 순간.
내가 주변을 신경 쓰며 애써 목소리를 감추자, 또 일어서 한적한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데려가 주던 순간.
내가 신경도 못 쓴, 현지에서 쓸 유심을 찾아서 구매해 오려 헐레벌떡 뛰어다니던 모습.
내 얼굴이 달아오를 때마다, 통화하는 내 다리를 쓰담쓰담해주던 모습.
통화를 끝내고 결과를 이야기하자 고생했다 이야기하며 배고프지 않은지를 살피던 모습.
그게 오빠였다. 티가 안 나더라도 묵묵히 '진짜' 필요한 도움을 주는 사람.
또 내 어린 마음이 원망으로 튀어나와 오빠를 할퀼 뻔했다. 하지만 오빠는 어른이었고 노련하게 내 손톱을 피해 오히려 내 등을 토닥였다. 그 소중한 순간들이 떠오르고 나니, 그 낮에 겪었던 일들이 우리의 재밌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오빠가 더해지니 스릴러가 로맨스가 되는 마법.
'비긴어게인'이라는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말한다. 음악이 있으면 내 눈앞의 모든 것이 뮤직비디오 같다고.
오빠라는 음악이 있으니, 내 삶의 모든 부분이 빛나기 시작했다. 평화롭고 은은하게. 오빠가 곤욕스러워하는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나 자신도 참 예쁘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진솔하게 순간을 살아내는 오빠도 참 예쁘다.
우리는 서로 삶의 순간 속에 비극이 드리워도, 그저 '생의 한 페이지 화끈하게 장식하는 중이구나.' 할 수 있도록 뮤직비디오로 만들어버리는 음악이 되어주면 되겠다. 서로의 음악이 되어주자.
그러면 우리의 생은 늘 영화롭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