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은 남자 옷에 왜 이리 야박한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리스본에 도착했다.
막연히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책으로만 접하고는 언젠가 나도 저곳에 가리라 꿈꾸어 왔던 곳. 도시 이름조차 너무도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바로 그곳. 리스본.
이제는 뭐 당황스럽지도 않다.
비행 시작부터 파란만장했기 때문에, 경유지였던 밀란에서 우리의 모든 짐이 멈춰있다는 말이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아 그렇구나. 그럼 아예 잃어버리는 건가, 받을 수는 있나?' 하는 물음이 생겼을 뿐. 분명히 짐을 싣을때 경유지에서 짐을 다시 보내야 하느냐 물었고, 그러지 않아도 알아서 옮겨 도착지인 포르투갈에 보내질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었다. 그러나 일이 그리 된 것이다. 일단 조치를 취하긴 해야겠기에, 포르투갈 공항에 내려서 공항 직원 몇 분께 문의를 했더니 모르겠다고만 했다. 그러다 발견한 'LOST & FOUND'라는 문구. 화살표를 따라가 친절한 직원을 통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우리의 호텔과 한국의 주소를 적어냈다. 그때 내가 신경 쓴 것은 오빠가 당황하거나 조바심 나지 않도록 내가 앞서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쓰다 보니 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게 됐고, 마음은 평온했다. 그래서일까 직원과의 대화가 오히려 즐거웠다. 직원은 명료하고 밝은 태도로 임해주셨고, 덕분에 우리의 첫 숙소 마지막 날 쯤이면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든든한 마음으로 믿을 수 있었다.
오빠, 칫솔이 16,000원이야. 이건 사야겠지...?
그거랑 스킨케어 제품 여행용으로 사긴 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우리 속옷이랑 갈아입을 옷 한 벌 쯤도 필요해. 지금 너무 꼬질꼬질하잖아 우리.
그래 그럼 이 근처에 큰 몰이 있으니까 가보자.
포르투갈 물가가 정말 비싸다는 생각이 든 건, 생필품 때문이었다. 정말 백팩에 들어있는 보조배터리와 기내용 미스트와 립밤. 주머니에 있던 샤넬 립스틱 하나.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살기 위한 필수품'인 생필품 쇼핑은 불가피했다. 더군다나 3일 안에 캐리어가 우리에게 안착한다면 그 안에 필요한 건 다 있었기에 지금 사는 모든 것들은 필요 없어질 것들이었다. 반 강제적으로 나는 선크림만 간신히 바른 노-메이크업 상태로 신혼여행 기간의 초반을 다 보냈다. '아, 신혼여행에서 예쁜 모습으로 추억 남기고 싶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오히려 자연스러운 내 모습으로 기억될 여행이라 더 좋은가-하는 생각도 들고 있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묻어 생생한 분홍색에서 톤다운 분홍색이 된 나의 바지. 편한 비행을 위해 최대한 편하게 입은 오빠의 티셔츠와 바지도 꼬질꼬질함이 눈에 보이는 형태가 되면 이거겠구나 싶도록 지저분했다. 그래서 우린 근처의 큰 몰에 들어갔다. 옷이 다 비쌌다. 캐리어에 한가득한 옷을 생각하니 그마저도 사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그렇지만 살아야 하기에. 한국에서도 몇 번 본 MANGO라는 브랜드에 들어갔다. 자라도 있고 했지만 남자 옷이 정말 없었다. 그 넓은 매장에서 남자 의류는 행거 두 개? 남자 옷에 왜 이리 야박하지 여기? 있는 옷들도 정말 이태리 남자들이 입을 것 같은 내 기준 너무 느끼한 옷들 뿐이었다. 통이 넓은 바지를 주로 입기에 신발도 왕토끼발 같이 큰 신발을 신고 온 오빠가 그 이태리 스타일 바지를 입으니 너무 웃겼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그나마 통이 좀 있는 일자바지와 티셔츠를 구매했다. 나야 예쁜 옷을 살 수 있었지만 나만 때 빼고 광내는 게 좀 미안해서 나도 같은 브랜드의 원피스를 하나 샀다. 70% 할인해서 89,000원. 세상 화려한 원피스 한 벌이면 그래도 기분 좋게 요 며칠을 나겠지 싶었다.
나오는 길에 드럭스토어에 들어가 여행용 스킨케어 제품으로 토너, 로션, 선크림, 폼클렌져, 칫솔 2개, 치약 미니 1개를 사니 80,000원이 넘었다. 와인이 한 잔에 4,000원인데, 이거면 와인이 몇 잔이야.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앗싸. 무용담 하나 늘었다.
그렇게 며칠을 살다 보니, 정말 첫 호텔의 마지막 날. 여행 3일째 밤에 들어온 우리 방에 캐리어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정말이지 캐리어 껴안고 울 뻔했다. 먼 길 돌아온 내 새끼. 어찌나 반갑고 애틋하던지! 캐리어를 여니 익숙해 마지못해 향수까지 느껴지는 내 소지품들과, 옷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우리는 캐리어를 놓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동안 우리는 이런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긴 것에 대해 서로를 향한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흥미로워하며 깔깔 웃고 지냈었다. 새삼 그 3일 동안 더 행복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P.S. 브이로그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리려고 영상을 많이 찍어놓았는데, 지금 보니 그 초반 모습은 꼬질 그 자체여서 소스로 쓸 수 있을까 싶다. 기억 속에선 이것보다 훨씬 예뻤는데 기억이 왜곡됐나 보다. 그나저나 오빠는 그래도 예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