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조마조마 인생 첫 에어컨 설치일기
대학생 시절 8주간의 여름방학 동안 방문했던
필리핀 마닐라 공항의 날씨가
물씬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 더위에도 나 혼자면
달달 거리는 선풍기 하나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뻘뻘 땀을 흥건히 흘리며
잠을 자는 아이들을 보면
이렇게 버티는 건 어쩌면 학대 수준이다.
전투토끼의 브런치 첫 글.
https://brunch.co.kr/@war-rabbit1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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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주 드디어 우리의 보금자리에도
에어컨이 생겼다.
벽걸이 보다도 훨씬 큰 기다란
스탠딩 에어컨 자태가 늠름하다.
그리고 에어컨 설치일의 이야기.
늘 그렇듯, 가전 배송은 배송일만 알려주고 시간은
그날 아침에 배정되는 대로 정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정말 에어컨이 오려나.' 하는 찰나
아침 8시가 조금 지난 무렵, 전화기가 울렸다.
기사님 : 에어컨 배송기사입니다.
이따 오후에 가도 될까요?
평소 같으면 편하신 대로 오라고 할 터이지만
에어컨은 설치 이슈가 있어
최대한 빨리 해결을 하고 싶었다.
나 : 혹시 가장 빨리 오실 수 있으면 몇 시일까요?
기사님 : 아, 그럼 9시 20분까지 가겠습니다.
(앗, 그때는 둘째 등원준비로 한창인 때지만,
놓칠 수 없어~")
그리고 운이 좋게도 친절한 기사님이신 것 같다!
나 : 네에, 오세요.
일단 첫째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포동포동한 귀요미 둘째 아침 먹이고, 옷 입히고,
설거지하고, 머리 빗기던 중,
"딩동"
배송기사님 2분이 서계셨다.
더위를 핑계로 집안 꼴이 영 엉망이어서
후다닥 몇 가지를 치우고는
이걸로는 영 안 되겠다 싶어 그냥 문을 열어드렸다.
나 : 안녕하세요!:D
반가움과 설렘 그리고 긴장.
기사님 두 분은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나를 부르셨다.
기사님 : 여기 배관이 구형이라서 신형 에어컨은
관이 둘 다 차가워져서 구멍을 새로 뚫어서
설치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배관을 건물에 구멍을 뚫어서
밖으로 빙 둘러서 설치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설치 비용이 좀 나올 것 같아요.'
머리가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나 : 설치비가 얼마나 나올까요?
기사님 : 한 60만 원 정도요.
아니면 밖에 앵글로 실외기 설치해야 하는데,
구멍도 밑에 간판이 있어서 뚫으려면 좀 복잡하네요.
원래 한 20-30만 원 정도를
예산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치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건물에 구멍도 뚫어야 한다니,
주인아주머니께 전화드려 먼저 물어야 했다.
나 : 안녕하세요. 여기 OO호인 데요,
아침에 실례합니다.
저희 에어컨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구형 배관을 쓸 수가 없어서
신형 배관하려면
건물에 새로 구멍을 좀 뚫어야 한다고 해서요,
괜찮으실까요?
주인아주머니 : 구멍을 어디다가 뚫나요?
건물 뒤쪽? 앞쪽?
나 : 앞쪽이요, 보기가 좀 그렇지요?
주인아주머니 : 애기들 있는데
에어컨 없으면 안 되지,
보기 싫기는 한데, 필요하면 뚫어야지요 뭐.
평소 마음씨가 좋으신 주인아주머니 셔서
흔쾌히 승낙을 해주시긴 했지만,
어떤 모양으로 설치가 되려나,
공사가 복잡할 것 같아
잘 마무리될지 걱정이 앞섰다.
'부스럭'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주인아주머니가 계셨다.
기사님 : 주인분이세요?
저희가 구형 배관이 안돼서,
구멍을 좀 뚫어야 돼서요.
주인아주머니 : 그냥 구형으로 하면 안 될까요?
여기 다른 집들도 다 그렇게 해서.
나도 공사 없이 구형 배관을 사용해서
설치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기사님들이 혹 구형 배관으로
설치했을 경우,
결로가 생길 수도 있어서
주인분께서 각서를 써주셔야
구형 배관으로 작업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세입자인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주인아주머니 : 그럼, 각서 써드릴 테니
구형 배관으로 해주세요.
(얏호, 감사합니다! 오예바리~예스바레~~)
구형 배관을 이용하면 비용도 그렇고 설치 공사 없이
비교적 간단하게 설치가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기뻤다.
그렇게 주인분께서는 흔쾌히 각서를 써주셨다.
공사는 약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였다.
나는 공사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얼른 둘째를 데려다주러 다녀왔다.
돌아가는 길에 감사한 마음이 들어
기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나 : 커피 사갈까 하는데 뭐 드시겠어요?
기사님 : 아메리카노 두 잔이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공사하시는 동안
나도 옆에서 열심히 집안 청소를 하며
오랜만에 부지런한 면모를 보였다.
공사는 다행히 순조롭게 잘 마무리되었다.
우리 집용 실외기가 반짝반짝 영롱해 보였다.
집에 들어서서 시원한 공기가 코로 느껴지니
정말 신이 나서 콧노래가 나왔다.
이렇게 좋을 일이라.ㅎㅎ
아이들도 저녁에 에어컨을 보면
얼마나 신나 할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도 신이 났다.
이 더위에 이렇게 소중한 에어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운 날씨에 공사하시느라 수고하신 기사님들,
그리고 너그럽게 배려해주신 주인 아주머니
천사들은 가끔 사람들을 통해 일한다.
이 날을 잊지 않고, 나도 더위에 힘들어하는
누군가의 집에 에어컨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삶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가
전부다.
I live with fully happiness.
by 전투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