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크족이 아니었다면?
결혼을 하고 나는 이직을 하게 되었다.
8년째 다니고 있는 회사는 코로나로 인해 사정이 안 좋아져 휴업 중이었고 언제 상황이 나아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신혼집은 서울을 가기에 좋은 위치가 아니었는데 나는 서울로 외근이 많았어서 운전시간이 4~50분 정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었다.
경력을 살려 동종업계로 이직을 알아보니 대부분 서울에서도 강남 쪽에 회사가 몰려있었다. 9시까지 출근하려면 집에서 6시에는 출발해야 하고 강남 가는 버스는 항상 만석이라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출퇴근을 할 생각을 하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열심히 쌓아온 경력이 아깝긴 하지만 워라밸을 꿈꾸며 신혼집 근처 회사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코시국이라 경제 상황이 좋을 때는 아니었지만 감사하게도 몇 군데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면접을 보다 보면 꼭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었는데
- 결혼하셨어요?
- 자녀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결혼 전에는 미혼이라고 하면 왜 안 했냐 묻더니 이젠 자녀계획을 묻더라... 나는 원래 자녀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딩크족이다 답변했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인 회사는 도보로 출퇴근이 가능하지만 정말 소규모에 조금의 지식도 없는 분야의 업종이었다. 면접을 보다 보니 사장님과의 대화가 느낌이 참 좋았다.
" 면접 결과는 언제 나올까요? "
" 기다리지 말고 생각 있으면 먼저 연락 줘요 "
오잉? 합격 여부를 내가 결정하라는 것인가...?!
작은 회사라 연봉은 40프로를 낮춰야 했지만 집과 가깝고 야근 없다는 점, 무엇보다 사장님과 면접 느낌이 좋았기 때문에 먼저 연락해보기로 했다.
- 안녕하세요. 생각 있으면 연락 달라고 하셔서 연락드려요.
- 다 맘에 드는데 신혼인 게 조금 걸리네요. 장기근속 할 수 있는 직원이 필요한데 임신, 출산으로 공백이 생길까 봐...
- 저 딩크족이라 자녀 계획이 없어요.
- 아! 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한가요? 출근 가능한 날부터 출근해요.
그렇게 나는 도보로 10분 거리의 회사에 출근하게 되었다.
경력도 포기하고 연봉도 낮춰 이직을 했는데 만약 내가 자녀계획이 있었다면 이직 준비 기간이 더 길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그냥 결혼을 했을 뿐인데 이직을 하는데 한 개의 턱을 더 넘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이직한 그 회사에서 5년 차 직원으로 계속 근무 중이고 22년 차 된 우리 회사에서 설립 이래 가장 장기근속한 직원이다. 근속 년수에 따라 연봉도 조금씩 올라가서 이전 수준과 비슷한 정도는 아니지만 사무직 치고는 나쁘지 않은 연봉 수준까지 올라왔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직주근접으로 퇴근 후 저녁이 있는 삶을 살면서 나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들이 많았다. 취미나 모임 등 하고 싶은 일들은 거리낌 없이 시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나는 흔히 말하는 N잡러가 되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블로그를 하고 있고 아파트 동대표와 주민차지회 위원, 최근엔 청년네트위크 위원에 위촉되었다. 브런치 스토리를 통해 작가 등록까지 되었으니 본업까지 6개의 잡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현재에 만족하면서 지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지금 회사에 입사할 수 있어서였던 것 같다.
만약 내가 딩크족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