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많은 이들에게 해방감과 자유를 제공하며, 삶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는 기회로 인식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책임과 일상에 얽매인 삶에서 벗어나면 예상치 못한 공허감이나 혼란을 겪는 이들도 많다. 아직 은퇴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분들은 다른 직업을 찾기도 한다. 나의 경우도 어찌 보면 아직은 가끔 강연도 하고 출판도 하고 연구 과제에 참여도 하니 정말 은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무적으로 하는 일은 전혀 없고, 하고 싶은 일만 선택적으로 하고 있기에 은퇴 생활을 맞이했다고 느낀다. 나는 지금까지의 생활만큼, 혹은 그보다 더 후회 없이 은퇴 생활을 보내고 싶다. (무료 이미지 사용: https://pixabay.com/photos/ball-beach-happy-ocean-pink-smile-1845546/)
나는 이제 거제라는 새롭고 기대되는 곳에서 시작하였으니, 첫 단추는 완벽하게 잘 꿴 느낌이다. 여기에 더하여 내가 자주 적용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원하는 운율인 "Something old, something new, something borrowed, something blue"을 적용하여 행복한 은퇴 생활의 규칙을 만들어 가고 있다.
"Something old, something new, something borrowed, something blue (오래된 것, 새로운 것, 빌린 것, 파란색)"는 서양 결혼식에서 신부의 행복을 기원하는 전통적인 운율로서, 각각은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 '오래된 것'은 신부나 가족의 과거와 연결을 나타내며, '새로운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상징한다. '빌린 것'은 보통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나 가족에게서 빌려오며, 행복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파란색'은 신뢰, 사랑, 순결을 나타낸다. 이 네 가지 요소는 결혼을 통한 새로운 삶에 행운과 축복을 가져다준다고 여겨진다. 이를 나의 새로운 삶에 적용하여 행복한 은퇴 생활을 만들어 간다면 어떨까?
'Something old'는 과거의 소중한 경험과 지혜를 뜻하며, 은퇴 후에도 이를 활용하여 새로운 길을 찾는 기반으로 삼는다.
'Something new'는 은퇴 후의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의미하며, 새로운 활동이나 관계를 통해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Something borrowed'는 타인의 도움과 조언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환경에 적용하는 것이다.
'Something blue'는 특히 파트너 (아내나 남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상징하며, 은퇴 후에 그 믿음, 사랑, 안정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요소를 고려한 규칙들이 내 은퇴 생활을 보다 풍요롭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고 느낀다.
규칙적인 운동: 나는 40대 중반부터 하루 30분에서 1시간 동안 걷기와 gym에서 근력 운동을 거의 매일 규칙적으로 해왔다. 남편은 나보다는 덜 규칙적이었지만 걷기는 열심히 했다. 진지하게 운동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내 운동은 그저 워밍업 수준이겠지만, 약간의 땀을 흘리며 거의 매일 20년 이상을 해온 것은 스스로도 대견하게 생각한다. 이런 방식의 운동은 은퇴 후 거제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아파트 내에 gym이 있어 편리하고, 1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 매회 1시간씩 필라테스를 추가했는데, 전신 운동이 되어 보람을 느끼고 있다.
건강 검진: 그동안 대학의 지원으로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아왔던 만큼, 은퇴 후에도 매년 받고 있다. 국가의 기본 검진 외에 추가로 정밀 검사를 매년 또는 격년으로 받고 있으며, 가족 중 치매와 고혈압 이력이 있어 이에 대한 주의도 기울이고 있다. 매년 8월을 건강 검진의 달로 정하였다. 아울러 안과와 치과 등 정기 검진을 받고 있다. 거제에는 종합병원 세 곳과 전문 병원들이 많아 대기 시간이 짧고 예약 없이 워크인 시스템으로 운영되어 편리하다.
좋은 식습관: 이 역시 우리는 은퇴 전에도 실천하고 있던 습관이었다. 다만, 조금 더 개선하고 좀 더 손쉽게 만들 필요를 느꼈다. 특히 아침에 빵과 치즈를 대신해 채소와 과일, 계란, 너트, 오트밀 등으로 바꿨다. 흰쌀밥과 현미밥을 주식이 아닌 반찬 개념으로 바꾸고, 세계 여러 나라 요리를 새로 시도하면서 건강과 맛을 모두 챙기려고 노력 중이다. 사진 1은 처음 만들어 본 태국 요리 팟타이. 맛과 비주얼에서 성공!
규칙적인 수면 습관: 우리가 가진 규칙적인 이 습관 역시 계속 유지하기로 하였다. 나의 경우 밤 11시에 자고 7시에 일어나며, 남편은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자고 6시 전에 일어난다. 나는 밤에, 남편은 아침에 조용한 혼자 만의 시간을 즐길 여유가 있는 이 습관은 건강 차원에서는 물론 서로에게 잘 맞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일들을 그대로 실천한다고 해도 갑자기 많아진 빈 시간과 새로움이 없는 은퇴 생활은 시간의 흐름을 모호하게 만들고 자칫 의욕을 잃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날씨와 기분, 자연의 부름 등에 따라 유연한 변화를 갖고자 하며, 새로운 경험을 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매일 하나씩 새로움을 경험하는 일상: 가능한 매일 새로운 경험을 통해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고 인지 활동을 자극하고자 한다. 오랜 시간 전공 서적만 읽어왔던 나는 최근에 새롭게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시도해보지 않았던 요리 레시피로 음식을 만들어보고 있다. 또한, 이전에 가보지 않았던 길이나 장소로 산책하며 거제와 그 근처 지역의 관광 명소를 찾아다닌다. 며칠 전에는 고성의 그레이스 정원에서 가을의 변화를 보고 왔다 (사진 2). 아침에 같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들을 들어도 임윤찬, 호로비츠, 랑랑, 유자 왕 등 피아니스트를 달리 해서 듣는다. 구체적인 차이는 모르지만 다른 느낌이 드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이런 소소한 변화와 시도를 통해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무료, 무형인 것들을 즐기는 일상: 거제에 와서 새삼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무료이면서도 무형의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 가슴을 시원하게 트이게 하는 넓은 바다와 더불어, 넓고 푸른 하늘과 둥실둥실 떠가는 구름이 나의 일상을 채운다. 바쁠 때는 이런 것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조차 눈치를 채지 못하였는데…. 이제 이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떠다니는 구름을 볼 때면, 어린 시절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순수한 상상을 하던 그 시절의 떨림이 마음속에 되살아난다. 그뿐인가? 수많은 공원과 해변, 도서관 등이 나를 반갑게 기다리고, 새로운 경험과 만남의 기회를 선사한다. 또한 가족과 친구, 이웃 간의 사랑과 신뢰, 그리고 고마움 같은 물질로는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귀한 무형의 가치들이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이 무형의 가치들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일상을 가꾸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웃과 교제하는 일상: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 거제로 이사 온다고 하니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에 가족이나 친척, 친구가 없는 곳에서 힘들지 않겠냐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거제에서도 산 중턱에 위치한 이 아파트 주민들은 거제 시내나 대도시에서 보기 드문 커뮤니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 커뮤니티 속에서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또는 그 이상, 알게 된 이웃이나 새로 이사 온 이웃들과 교류의 시간을 갖고 있다. 아침에 함께 커피를 마시거나 근처 카페에서 브런치를 하며 서로를 알아가기도 하고, 때때로 음식을 나누며 디너 파티나 간단한 와인 파티, 여름에는 큰 수박을 나누어 먹는 수박 파티나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통해 귀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사진 3은 작년 크리스마티 모임을 위하여 각자 준비한 음식 상차림이다. 계획한 모임뿐 아니라, 산책을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거나, 운동을 통해 알게 된 이웃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은퇴 전에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과의 대화와는 다르게 새로운 정보와 다양한 연령, 직업을 가진 이웃들의 생각을 배우며 교류하는 시간이 흥미롭다.
타인의 지식을 배우고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며, 가진 것으로 주변에 조금이나마 봉사하는 것은 은퇴 후 삶의 질을 높여준다고들 한다. 다행히 나와 남편은 배우고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해 왔고, 사회봉사를 우리의 지식 영역에서 해왔기 때문에 배우고 봉사하는 일이 어느 정도 습관화되어 있다. 지금도 다양한 것을 배우면서 흥미를 느끼고, 나누면서 기쁨을 느끼는 나를 발견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은퇴 후의 삶에 필요한 앱 배우기: 일본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앱들이 한국에서는 필수로 여겨진다. 그중 하나가 아파트 관리 통합 앱이다. 다행히 이사를 도와준 부동산 중개인이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여 이 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 앱은 생활의 편리함을 제공하며, 멀리 여행 중에도 각 방의 난방 조절이 가능하고, 방문자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침대에 누워서도 조명을 쉽게 제어할 수 있다. 또 다른 유용한 앱은 스마트폰에 설치하여 아파트 공동 현관문을 자유롭게 열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집안의 전자 기기를 관리할 수 있는 삼성과 LG의 앱들도 매우 유용하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겠으나, 혹 모를 때는 젊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필수적으로 설치해 두기를 권장한다. 나의 경우, 온라인 쇼핑몰 앱, 은행 업무 관련 앱, 여행 관련 앱, 정부 기관의 앱, 주요 국가별 뉴스 앱 등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앱들을 다운로드하여 사용법을 익히고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카톡 같은 채팅 앱이나 아파트 커뮤니티 카페 앱도 설치하여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도움을 얻고 있다.
AI 활용하기: 은퇴 후에는 첨단 기술이 필요 없다는 생각은 버리길 바란다. 예를 들어, OpenAI의 ChatGPT 앱이나 유사한 생성형 AI 앱인 AskUp(아숙업)등이 있다. 이들은 글쓰기, 이미지 생성, 번역 작업 등을 지원하며, 여행 계획을 세우거나 필요한 정보를 요약하고, 건강에 대한 조언도 제공한다. 물론 필요한 정보를 빠르고 쉽게 찾아주는 기능도 있다. 음성 명령을 통해 사용할 수 있어서 더욱 편리하다. 유튜브에는 사용 방법에 관한 비디오 강의가 많으니, 은퇴하신 분이나 은퇴를 앞둔 분들이 적극적으로 배워보길 권하고 싶다. AI 기술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일상적인 작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하게 해 주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나이를 잊고 배워보길 바란다. 나이에 상관없이 쉽게 배울 수 있고, 매우 유용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만큼의 봉사하기: 봉사의 의미와 즐거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큰 봉사도 있지만, 나는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 아파트 근처에서 휴지를 줍는 활동이 있다. 우리는 산책을 할 때 커다란 쓰레기봉지와 일회용 장갑을 자주 들고 다닌다. 아파트 주변이 비교적 잘 관리되어 있지만, 휴지나 담배꽁초, 개똥 등이 보이면 가볍게 줍기 위해서다. 기쁘게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근처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하나의 간단한 봉사는 핼러윈과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를 준비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핼러윈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을 미리 준비하고 문 앞에 약간 무서운 인형을 세워두는 정도다. 지난 크리스마스에는 부모님들의 도움을 받아 남편이 산타 할아버지 역할을 맡아 선물을 나눠주며 아이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사했다 (사진 4). 올해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니 부모님들과 함께 준비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Something Blue"… 서양 결혼식에서 신부는 전통적으로 흰 드레스와 함께 파란색 구두를 신거나, 파란색 핀, 리본, 브로치 등을 달거나, 파란색 꽃 장식이나 파란 칵테일잔을 사용하는 등의 상징적 의식이 있다. 이는 신랑과 신부의 사랑과 신뢰를 악마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부부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은퇴 생활에 이르러, 그동안 잊고 살거나 희미해진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를 더 굳건히 하거나 되찾아야 할 때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일과 육아에 바빴던 젊은 시절과, 직장과 사회에서 능력 발휘에 집중했던 중년 시절을 지나 은퇴 즈음에 돌아보니, 우리 부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공이 같고 대화가 활발한 편이었지만, 20여 년을 떨어져 살며 각자의 일을 하고 서로 다른 취미를 즐기며 지내왔다.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희미해지고 그 표현이 서툴러진 것은 사실이다. 이제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의 본업이 '둘이서 힘차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되었으니, 신뢰를 바탕으로 희미해진 사랑을 다시 확실히 느끼고자 한다. 매 순간이 아니더라도 자주 그렇게 느끼고 싶다.
먼저, 사랑한다는 표현을 말과 행동으로 하루에 한두 번씩 다시 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쑥스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하지 않으면 왠지 허전한 상태가 된다.
이에 더해,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서로가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한다. 산책이나 운동을 함께 하고, 집에서 서로 즐길 수 있는 영화를 같이 보며, 가끔은 요리를 같이 하기도 한다. 우리 중 한 명이 서울이나 다른 곳에 일이 생겨 갈 때도 종종 함께 가며, 여행도 함께 떠난다. 물론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서로의 현재 생각과 미래의 희망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약간의 설렘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이는 정말 기분 좋은 변화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