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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규 May 25. 2021

그녀라면 기약 없는 춤을 시작했을 터였다

Lyon, France

오랜 시간을 머문 도시일 수록 나의 언어는 침묵했다.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지나간 기억들을 글로 풀어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삶의 한 길목에서 느꼈던 공기의 온도는 비릿하게 남아 콧날을 간질일 뿐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불명확한 기억뿐, 냄새도, 풍경도, 여행의 소음도 제대로 남아있지를 않았다. 그나마 남은 것들이라곤 그와 그녀가 내게 지었던 미소들, 그 미소를 잊기 싫어 사진을 찍었다. 역동하는 보조개 사이로 당시 우리의 우정을 가늠해 볼 뿐이었다. 


도시에 대한 기억들은 대개 소중한 추억과 맞물려 있었는데, 결국 공간을 사람으로 기억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여행의 초점 부터가 사람이었다. 길을 나서기 전에 길목의 친구들을 수소문했고, 그들의 일상에 난입해 삶을 지켜보길 즐겼다. 친구가 출근하는 길, 자주 가는 카페, 허겁지겁 점심을 먹는 식당, 일을 마치고 종종 걷는 공원과 일몰이 보이는 도시의 아지트, 그런 곳들을 종일 따라다니다가, 다음날엔 같은 길로 혼자 길을 나섰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 길들을 가늠해 보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오전 아홉 시, 길을 나서 커피와 베이글을 집어들고, 아홉 시반, 조그만 트램에 몸을 싣겠지. 오늘의 점심은 아마 비건 음식, 종종 가는 샐러드 바에서 포장을 해 조용한 공원으로 향하겠지. 일이 끝나면, 도시를 가로지르는 하천의 물줄기를 따라 성곽에 올라 맥주를 시키고, 자전거 길을 따라 달려오는 또 다른 친구를 기다리겠지. 해가 지는 여덟 시, 도시가 어둠에 잠기면 시내 대학교의 교정을 거닐다 집으로 향하겠지. 아 오늘도 잘 보냈구나 하고는 말이야. 


그녀는 어디에서든 돋보이는 존재였다. 콜롬비아의 조그만 도시에서도, 인도의 산자락 마을에서도, 독일의 대학교 교정에서도, 프랑스의 고향에서도 그녀의 미소는 항상 반짝였다. 남들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급급했더라면, 그녀는 수많은 의미를 하나하나 살아내기 바빴다. 그녀에게 삶이란 춤이고, 웃는 것이며,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이고, 이별을 겪은 친구와 밤새 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쉬이 사랑했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친구를 만들었고, 친구들과 다음을 기약했다. 길 위에서의 만남과 이별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의 일부였다. 


그녀를 여섯 개의 도시에서 만났지만, 역시나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리옹에서였다. 오래된 시가지의 골목을 지나 그녀의 집으로 향하던 길은 낮게 내려앉은 푸른 하늘 아래서 오래된 흔적을 머금고 있었다. 우리는 푸비에르 언덕에 함께 올라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왔는데, 언덕 아래로 펼쳐지는 도시의 풍경은 론강과 손강의 물길을 머금어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언덕 아래의 도시를 사랑했다. 성당과 정원과 골목을 생각 없이 걸으며 우리는 밤새 춤을 출 생각을 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이미 춤을 추는 듯 경쾌했다.


도시 하나에 한 사람의 역사가, 한 사람의 인생이 중첩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이와 종종 함께 점심을 먹던 공원, 해가 지는 풍경이 싫어 등지고 걸었던 강가의 풍경, 새벽 세 시까지 춤을 추며 재잘대었던 클럽들과, 이제는 더이상 발걸음하지 않는 어린 날의 학교, 음주 후 꼭 들렀던 골목 어귀의 케밥 집과, 다음 날의 쌀국수집. 종종 낯선 골목에서 길을 잃을 땐, 어쩌다 마주친 풍경에 중첩된 기억들을 가늠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춤을 추었을까, 그래 그녀라면 기약 없는 춤을 시작했을 터였다.



뒷모습, 내가 만났던 도시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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