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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Oct 03. 2024

칸나

  

  칸나가 돌 틈에서 솟아 나와 꽃을 피웠다. 키가 크고 진한 색깔의 빨간 꽃은 한두 송이 만으로도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재작년 산책길에 아기 모종을 뽑아다가 울타리 밖에 심었다. 무너진 돌담 몇 개를 가릴 요량이었다. 작년에는 마을 제초 작업할 때 잡초인 줄 알고 마을 사람들이 낫을 가지고 베어내 흔적이 없게 만들어 속상했다. 그 아기 모종이 자라 올해는 예쁜 꽃을 피웠다. 비가 많이 와서 땅속에 있던 뿌리가 넓은 잎을 드러내 낫을 피해 간 모양이다.

칸나의 꽃말은 존경과 행복한 종말이란다. 여름 날 폭염에 누구나 기진해있을 한낮의 더위에도 칸나는 흐트러짐 없이 도도하다. 칸나의 꽃 색깔은 의외로 다양하여 빨강, 노랑, 주황, 하얀색이 있는데 나는 색이 선명한 빨간 칸나를 좋아한다. 한 송이의 꽃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며 어디에서건 반듯하게 서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감돈다. 하여 꽃송이의 화려함과 곧은 기둥으로 도도하게 내세우는 자존심이 나를 부럽게 한다.

  어렸을 때 돌아가신 내 친정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쯔쯔, 우리 딸을 어떻게 팔아먹을까. 얼굴이 떡판처럼 생겨서."라며 딱하다는 듯이 혼잣말을 할 때가 있었다. 떡반은 제사 때 쓰는 둥그렇고 넓적한 큰 접시를 말한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사십이 가까이 되도록 나는 떡판처럼 생긴 내 얼굴을 목에 붙이고 살았다. 그런 얼굴을 한 여자를 구제해 준 남편을 존경스럽고 한없이 고마워하면서 말이다. 

  결혼해서 사십이 가까이 되어가자 주변 엄마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자리가 생겼다. 엄마들은 가끔 나를 보면 '황신혜 닮았다'라고 하기도 했고, 더 나이 들어가면서는 '박정수 닮았다' 라거나, '고두심 닮았다' 파고들 했다. '황신혜, 박정수, 고두심'이 누구인가. 가까이할 수 없는 유명 연예인이 아니던가. 처음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손사래치며 당치 않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격하게 흔들었다. 그런데 당치 않은 말도 자꾸 들으니 그런가 보다 여기게 되고 격하게 부정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춘기 때는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얼굴을 떡판처럼 빚으셨으면 높은 아이큐와 총명한 머리를 만드셨어야지' 하면서 말이다. 나의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았다. 별 볼일 없는 얼굴과 총기 없는 머리는 집 안에서 팔다리를 늘 피곤하게 했다. 나는 없는 것투성이며 가진 것이 없다 보니 늘 고분고분했고 '예'라고 했고 '알았다'라고 했고 '그렇게 하겠다'라고 했다.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고 잘 사는 집안에서 자란 친구들은 하나님이 잘못 만들어낸 천연기념물이라면서 잘 보존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튼 사십이 넘어가며서 떡만 같은 얼굴을 보고 연예인을 닮았다고 하는데 헷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내가 예쁘다는 등, 연예인 달았다는 등의 말을 하면 전같이 '아녜요'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대답으로 응대를 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그랬다. 나는 '나도 알아요'라고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상대방이 오히려 당황해했다. 몇 번 그러기 시작하자 나도 뻔뻔해지면서 당당하고 자유스러워졌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미모를 아버지는 왜 못 알아보고 나도나를 몰라보고 살아가게 했는지 궁금했다. 억지로 추측해 보건대 아버지가 기준으로 삼는 미모는 나와 해당 조건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쁘다고 한다던데, 아마도 아버지는 부성애가 없었는지 모른다. 일찍 알았으면 모를까 이제 와서 내가 조금은 반반해 보이는 얼굴이라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마는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의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열 손가락 발가락으로도 헤아리기에 부족할 만큼 많은 것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불공평하다 하면 양심없어 보인다.  그냥 잠잠히 있기로 했다.

  

  칸나도 꽃송이를 한 겹 한 겹 들여다보면 말라버린 꽃잎이 구석구석 달려 있으나 화려한 색상으로 인해 가려져있음을 보게 된다. 화려한 자태도 시간이 흐르면 사그라진다. 화려한 종말. 서글프지만 어울리는 꽃말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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