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서'라고 하는 절기를 좋아한다. 이름만 들어도 시원한 공기를 연상시켜 가을이 왔음을 알려준다. 올해 여름은 더웠다. 해가 갈수록 여름 더위는 "올해 같은 더위는 처음 겪는다"라고들 입을 모았다. 올해라고 다르지 않아서 한낮의 뜨거운 열기는 쇠도 녹여버릴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가족들은 습관적으로 에어컨 리모컨부터 집어 들었다. 비싼 전기 요금의 충격파도 폭염 앞에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말복이 지나고 처서를 보내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의 표정들이 가볍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추는 중복과 말복 사이에 위치한다. 중복과 말복의 더위가 최고로 기승을 부리는 시점이라 입추는 수업을 알리는 학교 종과 같다. '입추'라는 절기의 이름으로 가을이 오기는 하겠구나 예측한다.
더위의 마지막을 뜻하는 말복은 여름이 끝나고 있음을 알린다. 늦더위의 기승이 남아 그늘을 찾을 수밖에 없다. 농촌에서는 김장용 배추와 무를 심기 시작하고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시기이다. 밭에 곡식은 여물어야 하고, 과수원의 과일들은 달콤해야 하므로 따가운 햇살은 필요불가결한 일이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피부 노화를 막기 위해 모자를 쓰고, 안면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검은 안경을 쓰고, 양산을 써서 누군지 몰라보게 한다. 택시 기사들이 제일 무섭다고 하는 모습이란다. 이때부터 수확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며 하늘을 바라보지만 태풍과 가을장마가 휩쓸고 지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무튼 더위에 죽겠다고 하면서도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숨을 쉬고 있다. 처서가 지나면서는 심하게 땀을 흘리지 않게 되니 나도 손이 많이 가서 미뤄두었던 일거리들을 찾았다. 마당의 가지치기를 해 주어야 하고 오다가다 하나씩 무너진 돌담 보수를 해주어야 한다. 장마를 겪어봤으니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상습적으로 물이 고이는 부분을 처리해 주어야 하고 마당 구석을 덮은 풀을 제거하는 올해 마지막 풀 뽑기 작업을 해야 한다. 가을이 지나면 곧 추위가 찾아와 일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길고 무더웠던 여름을 지내기가 모두에게 쉽지 않았다. 견디다 보니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계절이 다가왔다. 좋은 시간은 언제나 짧고 아쉽다. 농부들도 시기를 놓치지 않고 다음 작물의 수확을 위해 준비한다. 아침저녁 땅에 뿌려지는 거름으로 원초적인 냄새를 풍겨 토질에 영양을 공급하고 있음을 알고, 이른 아침부터 들리는 트랙터의 소리는 땅을 갈아엎어 있다고 알린다. 경운기를 몰고 지나다니는 연세 많은 어머님들의 모습으로 이 계절 부지런히 살아온 아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도 거둬들일 수확을 위해 동트기 전부터 읽고 쓰는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