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가지치기를 하느라 힘을 썼다. 말이 가지치기지 거의 벌목에 가까웠다. 나무가 귀한 동네라 맘 놓고 자라도록 내버려두었더니 파란 하늘을 가리고 햇빛을 가렸다. 나는 비장하게 서서 톱질할 나무의 순서를 매겼다. 나무들은 내 키보다 훨씬 크고 가지가 빽빽하게 자라 서로 여유로운 공간이 없었다. 톱이 앞뒤로 움직일 때 싸라기눈 같은 톱밥이 눈앞에 뿌려졌다. 내 무릎 밑의 나무 기둥을 톱질할 때 흙먼지가 섞인 톱밥이 회오리처럼 날렸다. 톱질은 팔을 빨리 움직이기보다 천천히 앞으로 당겨줄 때 잘 잘린다. 잘린 나무는 큰 기둥, 작은 기둥, 잔가지 이파리들을 모아놓고 찜질방의 땔감으로 쓰겠다는 교회 집사님 댁을 위해 준비해 놓으면 되었다.
앞으로 탁 트인 바다와 멀리 보이는 비양도 섬은 돈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천연의 조망이었다. 이곳에 나무를 심으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겠다는 그림을 그렸다. 나무를 심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웃었다. 나는 시베리아에도 나무가 자라는데 따뜻한 제주에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이상했다. 메실 묘목도 심고, 귤 묘목도 심었다. 지금은 한 그루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곳 판포리는 바람으로 유명하다. 살아보기 전에는 몰랐다. 특히 겨울바람은 살인적이며 바람 소리가 그렇다. 바람 소리는 실제 바람의 세기보다 더 무섭게 들리며 밖에 나갈 이유를 접게 한다. 바다가 가까이 있어 해풍이 심하여 꽃이나 나무를 심을 때는 심사숙고 해야 한다. 처음에는 심기만 하면 정원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고 나서는 죽어서 뽑고, 주변의 분위기에 맞지 않아 뽑고, 생각보다 너무 빨리 자라서 뽑아 버린 나무나 화초들이 심은 것보다 많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의 자연환경에 특별히 잘 자라는 나무가 있었다. 자연 발아하여 많이 자란 나무 중에 키가 큰 나무가 있다. '까마귀쪽나무'라고 하는데 제주 방언으로 '구럼비', '구럼비낭'이라고 불리면서 척박하고 바람이 심한 이곳 판포리에 많이 자란다. 까마귀쪽나무는 예쁜 색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대견하다 싶게 잘 자랐다. 키가 커진 까마귀쪽나무는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며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런 나무가 청명한 가을 하늘을 가리고 햇빛을 가리기 시작하자 사람이 사는 마당을 침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마당의 한두 그루는 내년 여름 만들어 줄 그늘을 위해 어느 정도의 키는 만들어 놓았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은 가지는 베어냈다. 뒷마당의 나무는 내 손안에서 관리가 쉽도록 기둥을 짧게 남겨놓고 베어냈다. 몇 발짝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니 장발이었던 남자의 머리를 서툰 솜씨로 까까머리로 만들어 놓은 형국이다. 남겨놓은 작은 가지들이 미처 깎아내지 못한 머리카락처럼 삐죽삐죽 솟아 나왔다. 상당히 오랫동안 제멋대로 자란 나무를 베어놓고 보니, 돌담을 엉성하게 쌓아놓은 울타리가 이웃 밭을 따라 길게 산성처럼 드러났다. 크고 작은 돌담 사이로 어른 주먹과 아기 주먹이 번갈아 오고 갈 수 있게 숭숭 나 있는 구멍으로 이웃해 있는 밭이 보였다. 이런 울타리로 여름 장마를, 태풍을, 겨울의 눈보라를 지켜내면서도 돌멩이 하나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톱질한 나무들은 기둥만 남았다. 작년에 심은 능소화가 잘려 나간 나무 뒤로 어지럽게 뻗어있었다. 햇빛을 보며 잘 자라서 내년에는 예쁜 꽃을 보자고 담벼락 위로 줄기를 걷어 올려놓았다. 해가 짧아지고 있어 추워지기 전에 일을 마무리 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내년 봄이 되면 잘린 기둥에서 푸릇한 싹이 돋아 나와 싱그럽고 어여쁜 나무로 재탄생될 것이다. 능소화는 어설프게 보이는 담벼락을 나 보란 듯 화려한 꽃으로 장식할 것이다. 나는 잘려나간 기둥과 가지들이 아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