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장독대를 만들기로 했다. 내년에는 직접 된장을 만들어 볼 심산인 게다. 삽을 들고 울퉁불퉁한 흙을 고르게 하고 옆에 있는 자갈을 쓸어다 깔고 모아두었던 현무암 판석을 깔았다. 바닥을 발로 밟아 탄탄하고 평평하게 다졌다. 몇 개의 단지를 가져다가 이리저리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날씨는 무덥고 이마에 흐르는 땀이 눈을 따갑게 했다.
내 유년 시절의 장독대는 키가 큰 항아리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항아리가 커서 안을 들여다보려면 까치발을 해야 했다. 둥둥 떠있는 메주는 손가락으로 누르면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떠오르곤 했는데 내 놀이였다. 따뜻한 날 엄마는 항아리 뚜껑을 열고 메주가 떠있는 장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고는 "음. 맛있다."라고 하시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나도 흉내를 내느라 장물을 찍은 손가락을 쩝쩝 빨았는데 이걸 맛있다고 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름날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어쩌다 밥을 먹는 일이 있을 때면 한결같이 엄마가 만든 된장이 최고라고 칭찬을 한다. 그때는 할머니도 칭찬에 인색하지 않다. 때로 엄마는 장독대 후미진 곳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숨죽여 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유는 모른다. 그래도 저녁 끼니때가 되면 두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식구들을 위해 장작불을 피우셨다.
엄마는 장작불을 때서 밥을 하면 솥에 밥을 많이 눌어붙게 했다. 그때마다 호랑이 같은 할머니는 쌀 아까운 줄 모른다고 엄마를 야단했다. 엄마는 어째서 불 조절을 그렇게나 못하고 맨날 혼났는지 모른다. 가끔 너무 많이 눌어붙어 누룽지를 뒤꼍 장독대 옆에 파묻은 적도 있다. 어느 땐가 집에 아무도 없고 입은 심심했다. 부엌에 들어가 찬장에 설탕과 소다를 꺼내고 국자를 이용하여 연탄아궁이에 쪼그려 앉아 또 뽑기를 했다. 길거리 아저씨 흉내는 냈는데 국자를 새카맣게 태워먹었다. 엄마에게 혼날 일을 생각하니 달달했던 입이 갑자기 쌉쌀한 소다맛이 맴돌았다. 나는 새카맣게 변해버린 국자를 들고 장독대 옆 담벼락 구석진 곳으로 가서 담구멍에 쑤셔 박았다. 저녁을 지으면서 엄마는 국자를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나는 조용히 있었다. 다음 날 엄마는 국자를 찾아내어 나를 불러 보여주었다. 무지하게 혼났음은 물론이다.
나는 지금도 마른 누룽지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잘 먹지도 않는다. 결혼해서 친정에 오면 다른 건 욕심이 없는데 된장과 김치를 꼭 싸가지고 다녔다. 이상하게 시댁의 된장으로는 맛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멸치는 물론이고 쇠고기를 넣어도 맛을 낼 수가 없었다. 가스 압력솥을 사용해서 밥을 하면 한 톨의 쌀도 눌어붙지 않게 한다. 여북하면 다니러 오신 시어머니가 "어쩌면 너는 밥을 지으면서 누룽지가 쬐끔도 안 생기냐?"라고 하셨다. 시어머니는 당신 아들에게 누룽지를 끓여먹이려고 일부러 밥을 태우셨다.
엄마는 언제나 멀리 사는 맏딸을 떠나보낼 때마다 섭섭해하고 아쉬워하셨다. 말하다 남은 끄트머리에는 "누구네 딸은 옆에 살아서 수시로 다녀간다."였다. 엄마의 남은 날을 나도 누구네 딸처럼 옆에 살면서 시시콜콜하고 소소한 일상을 나누기 위해 고향인 제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엄마와 가까이 지낼 수 있다면 지나간 시간을 두고 아쉬워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엄마와 가까운 곳에 있으면 동네 자자하게 소문났던 된장을 같이 만들 수 있겠다 싶어 나를 설레게 했다. 항아리는 어느 정도의 크기로 할까. 몇 개를 사다 둘까. 간수를 빼려면 소금은 미리 사둬야 하는 것은 아닐까 등등 생각이 많아졌다. 이런저런 계획이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세상일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엄마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통증이 없고 염증이 커지지 않을 때까지는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모시고 다녔다. 자리에 누워계시기 시작하자 엄마는 말씀이 없어졌다. 나는 가능한 옛날에 같이 지냈던 이웃 얘기며 지금은 개발되어 없어진 외가의 동네 이야기를 많이 했다. 마을 어귀에 큰 팽나무가 여름에는 넓은 그늘을 만들어 동네 어른들이 항상 모여 있었다는 얘기를 들려 드렸다. 외가의 부엌문을 열고 뒤꼍으로 나가면 장독대가 있고, 그 옆에 커다란 동백나무가 있고 등등의 얘기를 하면 엄마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그리고 어떤 날은 된장은 어떻게 담그냐고 물었다. 엄마는 눈을 감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건 쉬워"라고 하셨다. 허공에다 힘없이 손을 들고는 가는 소리로 "물은 이만큼, 소금은 이만큼 넣고 날계란 하나를 띄어봐. 반만 뜨게."라고 하셨다. 나는 "네."라고 하면서 엄마의 손을 이불 위에 얹어 드렸다. 힘드셨는지 엄마는 곧 잠이 드셨다.
요즘에는 시판용 된장도 먹을만한 제품들이 많다. 종류도 다양해서 찌개용, 쌈장용, 볶음용 등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옛날처럼 장모님 맛, 친정어머니 맛이라고 싸 들고 다니지 않는다. 나조차도 애들에게 된장, 김치 등을 싸주지 않는다. 반찬 한 가지라고 싸줄라치면 정색하며 거부하는 몸짓으로 나를 머쓱하게 한다. 된장이나 김치나 그저 맛있는 브랜드를 알려주면 된다. 아니 애들은 그것조차도 알려고 들지 않는다. 본인 입맛에 원하는 제품을 검색하여 로켓 배송을 시키면 그만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더운 여름날 나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장독대를 만든다고 기를 쓰고 있다. 내년에는 메주를 담가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그때 가봐야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함께 할 사람이 없는 이유로 함께 할 설렘도 사그라지고 있음이다. 오직 옛날을 붙들어, 가고 없는 사람을 불러내어 그때를 만들어 내라고 억지 쓰는 어린 나의 숨기고 싶은 마음을 엄마는 아실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가면 우리 애들은 엄마의 모습을 어떻게 기억할까를 생각하니 내가 지금 흘리는 땀에 자신이 없어진다. 점점 사라져가는 장독대를 만드느라고 땀 흘리는 엄마를 기억하라고 할까. 그럼에도 옛날이 있어서 지금이 있고 또 내일이 있다고 나를 위로하며 단지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자리를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