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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Nov 07. 2024

가을비

 

 빗소리에 잠이 깼다.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창문을 열었다. 하늘은 어둑어둑한데 비가 와서 흐린 건지 동트기 전 새벽하늘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휴대폰을 열고 밝은 빛과 함께 액정에 뜬 시간을 보았다. 다섯 시가 되기 전이다. 날이 밝지는 않은 시간이다. 굵은 비는 처마에, 지붕에 떨어지면서 콩 볶는 소리를 냈다. 차가운 공기가 기다렸다고 얼굴을 덮으며 신고했다. 창문을 닫고 자리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찬 기운이 거두 어간 잠을 되찾기 위해 이불을 붙들고 온기를 찾았다. 무게 없는 이불은 공중에 붕 떠있어 진한 온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겨울 이불로 바꿀 때가 되었는지 도톰한 이불이 아쉬웠다. 

  가을비는 한 번씩 내릴 때마다 기온을 떨어뜨리며 월동준비를 하라고 재촉한다. 과거에는 월동 준비에 관한 내용을 TV에서 보도하기도 했다. TV에서 보여주는 서울 가락시장에서는 밤사이 배추산을 이루고 어른들 가슴 높이만 한 드럼통에 젓갈을 가득 채워 주부들을 기다리고, 새벽 추위 속에 중무장한 상인들이 장작에 불을 붙여 둘러선 모습도 보여주었다.

  저녁상을 앞에 놓고 뉴스를 볼 때면, 어머니도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김장도 해야 하고, 연탄도 들여놔야 하고, 가족들을 위해 따뜻한 겨울 내복도 준비해야 했다.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날, 주문한 연탄이 도착하면 식구들도 덩달아 왔다 갔다 했다. 어머니는 창고에 쌓여가는 연탄을 바라보며 흐뭇해하셨고, 창고 입구에 흘린 연탄가루는 따뜻한 겨울을 약속했다.


  '겨울 화롯불은 어머니보다 낫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듯, 추운 겨울 1순위는 따뜻함이다. 할머니는 방마다 연탄 가는 일을 조상님 모시듯이 하셨다. 할머니는 연탄을 갈고 나서 아궁이 구멍을 막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연탄아궁이 구멍을 막아 불을 줄여서 한 장의 연탄이라도 아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연탄구멍을 막으며 다녔고, 할머니는 열었다. 밖에서 어머니가 아궁이를 만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면, 이내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셨다. 할머니 방에는 방바닥이 항상 절절 끓었다. 가끔 어머니는 할머니 방에 들어와 양손으로 방바닥을 만지면서 '불이 세다'라고 중얼거려도 할머니는 못 들은 체하셨다. 불이 활활 붙은 연탄은 수명이 짧았다. 새벽녘에 할머니 방에는 연탄불이 자주 꺼졌다. 나는 추위에 둔한 체질을 갖고 태어났는지, 연탄불이 꺼져도 자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와는 다른 체질이라 연탄불이 꺼지면 새벽잠을 못 이루시고 뒤척거리셨다.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누구 편도 들지 못했다.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권 지폐를 꺼내주시면서 연탄이 오래 안 간다고 볼멘소리를 하셨다. 나는 며칠에 한 번씩 번개탄 심부름으로 긴 골목을 자주 다녀야 했다.


  추운 겨울날, 밖에서 들어와 차가운 발을 이불속에 들이밀면, 벌떡 일어나 차갑다고 야단하면서 이불로 꽁꽁 감아주셨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 시절 좁은 방에서 식구들이 비비고 살며 서로의 온기를 나눔이, 아마도 특수 제작된 방한복이었을 거라 여겨진다. 아무튼 식구들은 추위에 살아남았다. 식구마다 방 한 개씩 차지해서 보일러를 켜놓고, 침대 위에 성능 좋은 전기장판 깔아놓고, 집안에서 휴대폰으로 통화하면서도 얼굴 한 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영화에서나 보던 호사를 누리고 있다. 나는 애들이 전기장판 코드를 빼지 않고 나갈 때마다 전기코드 빼라고 잔소리하고, 온도 낮추라며 어머니를 떠올린다.  

  할머니가 왜 그렇게 연탄과 씨름하고, 새벽녘 차가워진 방바닥을 싫어했는지 할머니 나이가 되어보니 알겠다. 나도 흐린 날은 전기장판 온도를 높여 등 대고 드러눕는 걸 좋아하게 되었으며, 걸핏하면 여기저기 아프다고, 할머니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할머니 방을 더 뜨겁게 달구어 드릴 걸 뒤늦은 아쉬움이 짙은 해무처럼 밀려온다. 

  지금 알게 된 일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려서라거나, 몰라서 그랬다는 후회할 일을 남기지 않았을 일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죠'라는 대목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이 구절 하나로 못다 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남아있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면 조금은 위로가 될까?

 잠은 이미 달아났고, 겨울나기 준비를 해야 할 생각에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한쪽에 쌓아놓은 철 지난 옷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빗소리는 여전하다. 창문에 굵은 빗줄기가 부딪치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잠들어있는 가족들은 코 고는 소리, 일정하게 내쉬는 숨소리로 평안하다. 빗줄기가 부딪치는 창문으로 먼동이 트며 아침이 흐리게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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