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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Nov 14. 2024

우리 외숙모

  막내 외삼촌 내외분이 다녀가셨다. 여름이 시작되는 문턱이었다. 친정어머니 장례식 때 잠깐 뵈었는데,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그래도 조카가 제주에 와서 메밀국수 가게를 시작했다고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한번은 다녀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게 문을 열고 가족들이 시끌벅적하며 들어서기 시작했다. 커다란 수박을 들고 맨 앞으로 걸어오는 삼촌이 반갑기도 해서 먼저 허리 굽혀 인사를 드렸는데, 삼촌은 손을 내저으며 뒤를 가리켰다. 뒤를 돌아보고 웃음이 터졌다. 뒤따라 들어오시는 분이 삼촌이었다. 그러고 보니 앞서 걸어들어온 삼촌은 꼬마였던 사촌이었다. 세월의 흐름을 삼촌의 가족을 통해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꼬마였던 사촌의 얼굴이 삼촌이라 해도 믿을 만큼 건장했다.

  "야! 이제 건장한 청년이 다 됐네."

  "누나도 참. 청년이라니. 애가 둘인데."

  '헉!'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거지?' 나는 우왕좌왕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육지에 사느라고 외가의 경조사에는 엄마가 인사를 대신했고 직접 찾아뵙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외숙모는 허리가 살짝 굽어있었고 젊을 때의 미모는 기품 있는 노년으로 가고 있었다. 같이 오신 외숙모의 여동생도 변함없는 모습이어서 반가웠다. 마침 손님의 발길이 뜸한 시간이라 왁자한 분위기로 자리를 잡고 앉아 우리 애들을 인사시켰다. 먼 길을 오셨고 점심때가 지났으니 시장하실 터여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음식부터 준비하라고 큰애에게 일렀다. 삼촌 식구들은 메뉴를 보시더니 생소하다고 하시며 '오리모밀'과 시원한 '판모밀'을 청하셨다. 아들이 곧 주방으로 들어가 오리와 대파를 굽기 시작했다. 오리고기가 센 불에 구워지면서 불향을 입히는 냄새가 홀 안으로 솔솔 스며나왔다.


  외가의 막내 외숙모는 정스럽고 살가운 성품을 지닌 분이다. 무뚝뚝하고 잔정 표현에 인색한 외가의 조카들에게나 우리 집식구들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 미모는 어떤가. 두루뭉술한 우리 집 여성들과는 다른 유전인자를 지닌 체형이다. 음식 만드는 솜씨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외숙모는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옆에서 많이 위안을 주셨다.  막내 외숙모는 가족이라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대학 졸업식에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 나의 섭섭함을 달래주셨다. 동생이 대학에 입학해서 머물 곳이 없어 난감해 할 때 외숙모는 선뜻 방 하나를 내주어 머물게 하셨다. 얼마 후에 내가 데리고 나오기는 했지만 어려웠던 시절에 자주 우리에게 다가와 힘내라고 웃음을 보여주셨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난감했던 우리에게 기죽을까 봐서 오히려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큰 외숙모는 여장부 같다. 그 옛날 제주에서 있었던 전대미문의 배가 침몰되는 남영호 사고가 났을 때, 생존한 몇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큰 외숙모는 아마도 오래 살게 될 거리고 들 입을 모았다. 통 크고 잔정 같은 건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르는 분이다. 알기로 음식 또한 만들 줄 모른다. 미모에 관해서는 모르겠지만 장부 같은 체격과 화통한 목소리 앞에서 맞짱 뜨는 남자를, 그런 사람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일가를 돌아보는데 인색하고, 움켜진 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느라 주변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멀리하게 되고 주변에 발길이 끊어졌다. 큰 외숙모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변에 조금은 넉넉한 마음으로 돌아볼 여유가 있었다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세월은 장사도 붙들지 못하고 흘렀다. 어렸을 때 보던 막내 외숙모의 수려한 외모가 주름진 얼굴, 구부러진 허리를 하고 만나게 될 줄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서글픈 마음을 감추었다. 학생이었던 내가 환갑이 지났으니 외숙모인들 그대로이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지금의 상황이 변함없이 계속될 거라는 자신이 믿는 믿음 속에 산다. 수입이 여전할 거라는 것, 사랑이 변함없을 거라는 것, 건강을 잃을 일은 없을 거라는 것, 청춘은 여전할 거라는 것 등등이다.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 고 하는데 나도 받은 정을 돌려줄 때가 되었다. 받은 정에 힘입어 살았으니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 베푸는 사람으로 살아보자 생각했다. 세월은 흘렀지만 외숙모는 여전히 아름답고 다정했다.

  음식이 다 됐는지 아들과 딸이 주방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리모밀과 판모밀을 들고 와서 테이블에 놓았다. 삼촌 식구들은 정말 맛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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