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권사님이 작은 호박이라도 줄 테니 먹어보라고 하셨다. 호박이 없기도 해서 "고맙습니다"라고 대답부터 했다. 며칠 후 가게 마감 시간이 임박해서 권사님 차가 가게 앞에 섰다. 권사님은 ‘작은 거라도 줄 테니 먹어 봐요’라고 하시면서 들고 오시는데 작은 호박이 아니었다. 그러고는 차 문을 열고 또 한 개를 꺼내셨다.
"두 개씩이 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한 개를 꺼내시면서 자꾸 말씀하셨다. 호박은 5개가 되었고 작은 호박이 아니었다. 마구 자란 누런 호박을 한쪽 벽에 모아두었더니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다.
나는 늙은 호박을 좋아한다. 푸른 애호박도 나름으로는 용도가 있다. 된장찌개나 각종 부침에 사용해서 음식의 시각적인 맛을 더해 주지만 입으로는 특별한 맛을 느낄 수는 없다. 호박은 손톱만 한 크기의 씨앗이 잎을 무성하게 자라게 해서 갓난아기의 주먹부터 시작하여 양팔을 다 써야 할 정도의 호박을 열리게 하는 그 힘이 어디서 오는지 미스터리다.
무성하게 자란 호박잎은 국을 끓이면 시원하다. 줄기의 겉껍질을 살짝 벗기고 이파리의 솜털이 없어지도록 빨래하듯이 박박 비벼 씻는다. 멸치 육수 넣은 냄비에 물이 끓으면 손으로 찢어 넣는다. 밀가루 서너 숟가락 반죽하여 수제비를 만들어 냄비에 놓고 소금 간을 해서 저녁상에 놓으면 국물도 시원하고 건더기와 수제비도 별미로 먹어볼 수 있다. 또한 누런 호박으로 쑨 호박죽은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 음식으로 통한다. 작은 씨앗 하나가 버릴 것 하나 없이 모든 걸 내줄 수 있을 만큼 많은 걸 지니고 있음에 감탄한다. 못생긴 얼굴을 호박꽃에 비유하는 말을 하는데 누군가가 큰 실수를 저지른 일이다.
늙은 호박은 양손을 이용해서 들어 올려야만 할 정도의 부피와 무게감을 가지고 있으며 기품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꼭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생긴 여러 갈래의 골은 깊은 계곡과 같은 비밀스러움도 느껴진다. 딱딱하고 억센 껍질로 싸인 호박은 속살을 내보이기를 쉽게 허락하지 않고 능숙한 칼잡이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호박이 허락하는 칼잡이가 되기를 기꺼이 수락했다. 그래도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어 게 중에 제일 작을 놈을 골라 넓은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유년 시절, 명절 때는 할머니가 최고 큰 호박을 툇마루에서 꺼내다가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호박을 할머니는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돌리면서 스테인리스 숟가락을 움켜쥐고 매끈하게 벗겨냈는데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크기로 납작납작 썰어 쌀가루와 같이 버무리면 호박이 반 쌀가루가 반이 되었다. 큰 시루에는 구멍마다 얇게 썬 동그랗게 생긴 무를 깔고, 호박을 버무린 쌀가루를 부어주고 삶을 팥을 켜 켜로 깔아주는데 시루에 가득 부었다. 떡시루를 가마솥에 올려 장작불을 지펴 놓으면 부엌 입구에서부터 떡이 익어가는 냄새가 났다.
다 익은 떡은 시루를 거꾸로 뒤집어 온전하게 꺼내야 하는데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지, 떡이 빠져나올 때 할머니와 어머니는 환호성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이때가 두 분의 호흡이 가장 잘 맞는 시간이었다. 할머니는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면서 칼로 자른 시루떡을 식구들에게 한 접시씩 나누어 주었다. 하얀 떡 사이사이에 박힌 호박이 노랗게 보였다. 나는 시루를 거꾸로 뒤집는 묘기가 신기했을 뿐이었는데 할머니는 자꾸 내게 떡을 먹으라고 재촉했다. 사실 호박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 때는 누가 사탕 같은 단 과자를 더 좋아했는데 어른들은 그걸 알지 못했다.
도마에 올려진 호박을 할머니와는 다르게 나는 호박을 쪼갠 다음 크기를 작게 해서 껍질을 벗겼다. 혹여나 칼로 뚝뚝 썰면서 껍질을 벗기고 있는 나를 보고 ‘살점 다 떨어지겠다’라고 하며 혀를 차는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호박을 썰어놓고 보니 양이 많았다. 봉지 몇 개로 나누어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로 볶음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호박을 납작납작 썰어 기름 두른 팬에 볶으면서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양파와 대파를 썰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참기름 한 방울 둘렀더니 훌륭한 호박볶음이 되었다.
할머니는 발라먹을 것 없는 생선 대가리를 먼저 끌어당겼다. 생선의 맛있는 부위가 대가리인가 보다 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할머니가 그런 재빠른 동작으로 대가리를 끌어당겼을 이유가 없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대가리를 우리가 뺏어올 자신이 없었기로 밥상에 모여 앉은 어린 동생들과 나는 부드러운 살점을 먹느라 젓가락 움직이는 손이 빨라졌다.
풋풋하고 예쁜 호박에 관한 글귀는 찾기가 쉽지 않아도 잘 익은 호박을 두고 하는 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굴러온 호박’ ‘호박이 덩굴째로 굴러 떨어진다’ ‘시렁에서 호박 떨어진다’ 등의 뜻하지 않던 좋은 일을 말할 때 같이 쓰는 말이다. 그러나 유독 꽃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호박꽃도 꽃이냐’ ‘오뉴월 장마에 호박꽃 떨어지듯’ ‘꽃은 꽃이라도 호박꽃이라’ 등등 꽃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꽃을 식용으로 쓰는 일은 본 적이 없는 걸로 봐서. 꽃이 아무리 커도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 못하는 이유로 무시당했을 것이었다. 아무튼 누가 뭐라고 해도 잘 자란 호박은 보기만 해도 일 년 양식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니 호박을 봐서라도 호박꽃을 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야겠다
호박잎 국, 호박볶음을 반찬으로 놓고, 고등어 한 마리 대가리를 자르고 자글자글 구워 올려 낸 밥 한 상을 할머니 앞으로 차려드리고 싶다. 유가 사탕을 좋아했던 어린애는 이제 어른으로 자라, 노란 호박이 섞인, 시루에서 쪄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을 더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