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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킵고잉 Jan 21. 2024

#12. 가해자와 같이 산다는 것

일주일 전에는 남편, 이제는 가해자

이틀 동안 이어진 합의서 작성을 끝내

그는 ‘역시나’ 뻔뻔하게 전세금의

자기 자금이 있으니 집에 들어오겠다고 했다.


그럴 권리가 있고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이건 이거다라는 논리. 어이가 없어 비밀번호를 변경하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변호사에게 물어보니 문을 불법으로 따고 들어오는 건 주거침입이 되지만 그 사람이 의사를 법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했다.


전세금 중 그의 몫을 주고 떠나게 하지 않는 한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일단은 일요일 저녁 최대한 늦게 들어오는 걸로 협의를 봤다.


내가 그의 성매매 사실을 안다는 걸 말하고 울고불고했던 지난주 일요일.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 지났다.


7일 동안 나는 생존본능으로 버티며 살아왔다. 그래도 집에 와서는 혼자이기 때문에 외로움도 있었지만 그가 없는 내 집이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제 같이 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턱 막혔다. 특히 일주일 전 나에게 무릎을 꿇고 빌던 사람이 아닌 뻔뻔하게 태도가 바뀐 사람과 같이 지내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일단 그는 그의 작업방과 그 옆에 있는 화장실, 그리고 주방 잠깐 사용하는 정도로 협의를 봤고

작은 화장실이 딸린 안방은 내가 쓰기로.


그래서 혹시라도 그가 공용 공간에 있는 내 물건 중 중요한 걸 보거나 정보를 가져갈까 싶어 그가 오기 하루 전에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나의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안방에 넣어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안방에서 내가 자고 있을 때 두렵지 않으려면 열쇠가 있는 방문고리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열쇠문으로 바꾼 걸 보고 그가 자기를 범죄자 취급하는 거 같아 화를 내면 어떻게 하지 무섭기도 했지만 그러면 그때는 경찰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모를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오버하더라도 내가 예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가 오기 전날 밤 열쇠공을 알아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올 수 있는 사람으로 연락을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그 작업을 했다.


현타가 왔다. 나랑 살 부딪히며 자던 사람을 이렇게 범죄자 취급하며 나를 공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다니..

그리고 이 안방문을 매일같이 잠그고 열고 할 때마다 정말 이게 무슨 짓이지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았다.


현타가 오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들에 대비책들을 마련해 놓고 안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가 현관문을 열고 온 소리가 들렸고 그가 그의 방을 닫을 때마다 약간 흔들리는 나의 방문이 혹시 이 사람이 열려고 하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에도 휩싸이게 했다.


같이 사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변호사가 말을 해줬는데 무슨 말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에게 합의서 내용대로의 돈만 마련해 주면 끝날 일이었는데 그러자 못하는 게 너무 답답했다. 이미 나의 목돈은 이 집 전세금에 있고 1년 동안 쉰 나에게는 대출이 이뤄지지 못했고, 부모님께도 손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게 돈을 주려면 이 집을 빼고 전세금을 받아 줘야 하는 건데 나는 정말 이 집을 잃고 싶지 않고 이사할 집을 알아보는 것, 혼수들을 정리하는 것 등등 이런 것까지 해낼 힘은 없었다.


그렇게 막막한 나의 상황을 안 친구 2명이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살면서 내가 못 받을 돈까지만 친구사이에 돈을 빌려준다는 나름의 신념이 있었는데 그런 비슷한 생각을 사진 친구 두 명이 나를 도와준 것이다.


내가 먼저 돈을 빌려달라고 하기 전에 상황만 듣고 그러면 자신들이 돕겠다고 말한 그 친구들이 너무나도 고마웠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릴 일이 절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인생 정말 모르는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불행 중 다행으로 이력서를 넣었던 전회사에서 연락이 와 면접이 잡혀 그나마 그걸 준비하며 잡념을 떨칠 수 있었다.


정말 불행 중 다행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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