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들어가세요~”
억지로 지은 미소와 함께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내 모습을 비추던 화면이 꺼졌다. 드디어 끝이 났다. 가족모임의 첫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작은 화면을 통해 오랜만에 본 가족, 친척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다들 얼굴이 좋아 보였다. (나도 남들이 봤을 때 그렇게 느끼길 바라며 오랜만에 화장을 했다.) 인사를 나눈 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한 명씩 돌아가며 근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달에 취업에 성공한 친척 동생이 출근을 앞두고 들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왕국의 수출입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작은 아빠는 기후 위기로 인해 상황이 많이 바뀌고 있다며 지구의 미래를 걱정했다. 돌고 돌아 내 차례가 왔다. 모두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내가 말을 꺼내기 전 2초간의 정적이 있었다.
”저는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보고, 잘 들으면서. 아프지 않고 나름 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저 화면 너머 속 사람들에게도 내가 잘 지내는 사람처럼 보일지는 모르겠다.
“그래,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어디 다니는 곳은 있어?”
“아직 찾아보고 있어요.”
아직이라는 대답에 화면 너머 속 어른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면접 때 보았던 면접관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세바스찬도 잘 지내고 있어요!”
괜히 옆을 지나가던 세바스찬을 들어 화면에 비춰보였다. 귀여운 강아지를 보며 내 걱정을 조금 덜기를 바라며. 다행히 자연스럽게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휴, 이번엔 좀 짧게 끝났다.
가족모임을 마치고 왠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싶어졌다. 얇은 겉옷을 한 장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많이 시원해졌다. 막상 지나 보면 별거 아닌데 내 근황을 묻는 그 시간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우리 가족들은 다 착하다. (가족이라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렇다.)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내가 말하기도 전에 해주셨다. 어쩌면 공주로서의 특권일 수도 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남들이 원하는 것들을 해주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나보다 남들이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사실 엄청 편한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어쩌면 평생 그렇게 살 수도 있었다. 남들에게 의지하는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인다는 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다. 핸드폰 화면이 밝게 빛났다.
‘뭐 필요한 건 없니?’
아빠에게 온 연락이었다. 저녁에 먹은 떡볶이가 매웠는지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지나가던 공원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네, 괜찮아요!’
화장실 안에 들어가 아빠에게 답장을 했다. 왜 어른들이 어린이들보다 거짓말을 잘하는지 알겠다. 많이 하다 보면 느는 게 거짓말이다. 진짜 솔직히 말하면 그냥 아빠에게 돈을 엄청나게 많이 보내달라고 하고 매일매일 놀러 다니고 싶다. 아무 걱정 없이 놀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시 궁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리고 그다음은 모르겠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내가 말도 꺼내기 전에 모두 할 수 있었던 삶의 부작용은 한국에서 나타났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아니 그전에는 부탁할 일이 없었다. 거짓말을 많이 하다 보면 늘듯이 반대로 많이 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나에게는 부탁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었다. 말을 잘하다가도 부탁할 일이 생기면 목소리가 작아지고 괜히 소심해졌다. 의지하는 것과 부탁하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정말 다르다. 내가 간절하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이 뭔지 명확히 알아야 정당하게 부탁할 수가 있다. 누군가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요청하는 일은 매우 용기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
똑똑
“네?”
“죄송한데, 혹시 휴지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여기 칸에 휴지가 다 떨어져서…”
용기 내서 목소리를 내어보았다.
“아 잠시만요.”
벽 아래로 휴지를 든 손이 넘어왔다.
“감사합니다.”
옆칸에서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 칸에서 사람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숨죽여 손 씻는 소리 후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 난 다음 나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아, 아직 안 나가셨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눈을 마주친 사람에게 눈인사를 건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