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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공주 Sep 26. 2024

공주의 꿈

 어린이집에서 일일알바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고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초청해 직업에 대해 소개하는 행사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백수인 내가 공주라는 이유로 초청이 되었다. 공주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 많은 인기를 끌고 있어 공주라는 직업? 도 덩달아 인기가 많아졌다. 많은 아이들이 공주가 되고 싶어 했고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 본 진짜 공주가 될 예정이었다. 사실 공주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지만 아주 어렵다. 공주로 태어나기. 아빠가 왕이고 엄마가 왕비면 자동으로 공주가 된다. 나는 공주가 아니라고 공주가 되기 싫다고 해도 이미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공주가 되는 것이다. 사실 공주가 되면 좋은 점이 많다. 아빠가 왕이다 보니 흔히 말하는 금수저로 살아갈 수 있고 뭐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공주나 왕자가 궁전이 숨이 막힌다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들을 부담스러워하고 도망가는 경우도 많은데 궁전보다 내가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는 원룸이 훨씬 숨이 막힌다.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수십 개의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도 시켜주고 복도 끝에서 끝까지 술래잡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궁전에서는 숨이 막힐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전에서 숨이 막힌다면 기관지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심리적인 압박감이 있다고도 하는데 요즘엔 공주가 하는 역할이 크게 없어서 꽤나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하고 싶은 일들도 마음껏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공주보다는 연예인에게 더 관심이 많다.)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일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공주로 사는 것은 꽤나 괜찮다. 사실은 아주 좋다. 공주라는 직업이 있다면 누구라도 하고 싶어 할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순 없으니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지 많은 고민이 됐다. (하루 전날 감기에 걸려 못 갈 것 같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계속해서 고민을 하다 결국은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주어야 할지. 사실 공주는 직업이 아니고 아이들이 될 수 없는 건데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지. 고민들을 마구마구 쏟아내자 아무래도 엠비티아이가 F이신 것 같은 선생님께서 내 말에 전부 공감을 해주셨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내 고민이 깨끗하게 해결되었다.


 “공주님, 아이들도 다 알아요. 자기들이 공주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냥 공주를 실제로 보고, 공주에 대해 알고, 공주인 척해보는 것이 좋은 거예요. 공주님에게 당연한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고 재미난 것들일 거예요. 그냥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돼요. “


 공주에 대한 편견일 수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예쁜 공주옷을 좋아하다 보니 최대한 예쁜 옷을 입어주시면 좋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선생님과의 통화를 마쳤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다음날 나는 최대한 예쁜 옷을 입고 (한국에 올 때 왕궁 행사 때 입던 드레스를 딱 한벌 가져왔는데 처음으로 입어봤다.) 어린이집에 갔다. 교실에 들어가자 내 드레스에 달려 있는 비즈보다 더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이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이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공주님은 어디서 옷을 사요?”

 “공주님은 어떤 음식을 좋아해요?”

 “공주님은 지금 어디에 살아요?”

 아이들의 질문에 하나씩 대답을 해주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 후에는 궁전에서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궁전은 어떻게 생겼는지, 공주는 궁전에서 무엇을 하는지, 무도회에서 어렸을 때 좋아하던 왕자 오빠를 쫓아가다가 뒤로 발라당 넘어졌는데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가 아빠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처럼 회사에 가고 싶다는 아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아이, 케이크가 너무 좋아서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신이 나서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이 조금은 부러웠다. 그때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공주님은 뭐가 되고 싶어요?”

 “나? 어? 음…”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야 공주님은 이미 공주님이잖아.”

 다른 아이가 옆에서 질문을 한 아이를 향해 말했다.

 “공주님도 하고 싶은 게 있을 수 있잖아! 우리 엄마도 엄만데 회사에서 일하거든?”

 뭐라고 대답할지 모를 때는 아이들에게 역으로 질문하라는 선생님의 조언이 떠올랐다.  

 “공주님은 아직 뭐가 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뭐가 되면 좋을까?”

 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오늘 보니까 공주님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해요. 이야기 만드는 사람이 좋을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다.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선생님의 진행에 따라 교실 밖으로 나오며 행사가 끝이 났다.


 생각보다 즐거웠던 알바였다. 페이도 생각보다 괜찮고 다른 어린이집에서도 이런 행사를 하는지 알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했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야기 만드는 사람이라니. 평소 친구들에게 노잼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나인데 내 수준이 아이들에게는 딱 맞았나 보다. 걸을 때마다 드레스 끝자락이 운동화에 밟힌다. 빨리 집에 가서 이 드레스부터 갈아입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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