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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공주 Sep 24. 2024

공주와의 산책

 아침을 먹고 그릇을 싱크대 안에 넣어놓았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다. 의자에 앉아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다가 다시 점심을 먹을까? 란 생각까지 들자 그냥 세바스찬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여름이었으면 이 시간에 절대 나가지 않았겠지만 지난주부터 날이 조금씩 시원해지더니 완연한 가을이 되었다. 한국은 여름엔 무지하게 덥고 겨울은 살을 에리듯 춥지만 가을과 봄이 중간에서 숨통을 트여줘서 살맛이 나는 것 같다. 어제 잠을 잘 때는 코끝이 살짝 시려서 여름이 아주 조금 그립기도 했다. 세바스찬이 입을 옷을 들고 왔더니 세바스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침대로 가서 이불을 들춰보니 이불 안에서 몸을 도넛처럼 동그랗게 말고 있다. 산책을 싫어하는 개라니, 너도 참 특이하다. 억지로 옷을 입힌 뒤, 세바스찬을 들고 문 밖으로 나왔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모든 백수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왕 백수라면 침대에 하루종일 누워 자책하며 무기력한 백수보다는 밖에 나가 산책도 하고 밥도 잘 챙겨 먹고 부지런한 백수가 되어봅시다! (나도 어제는 전자의 백수였다.) 물론 매일 그럴 순 없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밝은 백수를 연기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빠가 왕노릇 하는 것을 보며 자라서 그런지 나에게도 약간의 꼰대 기질이 있는 것 같다.)  


 밖으로 나오니 세바스찬이 꼬리를 흔들며 신나게 걸어간다. 쟤는 분명 인프피인 것 같다. 막상 나오면 좋아할 거면서. 세바스찬과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쁘게 핸드폰을 보며 걸어가는 사람,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는 학생, 여유롭게 가을 날씨를 즐기며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학생을 제외하고는 다들 출근을 안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뭐 마침 오늘 휴가를 냈을 수도 있고 근무 시간이 자유로운 사람일 수도 있고, 잠시 외근을 나온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백수가 나 하나만은 아니구나 하는 긍정 회로를 돌려본다. 사실 백수라는 게 불법도 아닌데 왜 그렇게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우리 가족은 한 달에 한 번씩 가족 모임이자 회의를 한다. 어렸을 때는 궁전에 다 함께 모여 친척, 사촌들과 티타임도 가지고 다들 일정이 맞는 날에는 파자마 파티도 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다들 어른이 되자 파티는 사라지고 작은 핸드폰 화면을 통해 얼굴을 비춰야 하는 괴로운 시간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최악인 것은 그중 나만 백수라는 사실이다. 작은 핸드폰 화면에서 나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눈빛이 너무 불편하다. 그 작은 화면에서도 불편한 기운이 마구 풍겨오는데 한국에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겠다. (왕국을 떠나 한국으로 온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 괴로운 시간이 내일로 다가왔다. 지난주에는 핸드폰 화면에서 커다란 손이 나와 내 몸을 쥐고 마구 흔드는 악몽도 꿨다. 1시간, 그 1시간만 잘 버티면 한 달은 넘길 수 있다. 걱정을 하다 보니 벌써 세바스찬과 동네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생각에 빠지다 보니 산책을 즐기지도 못했다. 집 쪽으로 가는 길목 앞에서 세바스찬이 꼬리를 흔들며 나를 끌어당긴다. 안되겠다.


“세바스찬, 오늘은 한 바퀴만 더 돌자.”

위로 높게 치솟았던 세바스찬의 꼬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내려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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