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이 뜨끈뜨끈하다.
눈을 떠보니 나는 또 벽에 딱 붙어 자고 있다. 세바스찬 2세가 내 베개를 다 차지하고 등에 딱 붙어 누워있다. 예전에는 침대가 커서 둘이 같이 자도 아무 문제없었는데. 싱글 침대를 함께 쓰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아 참고로 세바스찬은 사람이 아니고 개다.) 세바스찬을 살짝 옆으로 밀어내자 눈을 슬며시 떠서 나를 쳐다보고는 몸을 둥글게 말고 다시 잔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 알람 울리기 1분 전이였다. 사실 알람이 울려도 그냥 끄고 자면 된다. 딱히 나를 기다리는 곳도, 나를 찾는 곳도 없다. 그래도 한번 깨면 잠이 잘 안 오는 편이라 알람 시간에 딱 맞춰 일어나는 걸 좋아한다.
잠은 다 달아났지만 침대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서 SNS를 켰다. 아침부터 새로운 사진들로 가득하다. 올리비아 공주가 한 손에 카페에서 산 음료를 들고 차 안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다.
‘왜 아직 수요일이지. 오늘도 바쁠 예정.‘
회사에 출근하는 길인 듯하다. SNS를 살펴보면 모든 공주들이 내 친구들처럼 엄청 대단한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사실 대단한 일의 기준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올리비아처럼 회사에 다니는 공주들도 많다. 뭐 회사에서도 그냥 조용히 출근만 하는 게 아니라 홍보모델을 하거나 승진을 빨리 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무튼 평범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공주들도 많다. 공주들은 대부분 부지런하다. 늦잠을 자고 싶어도 스케줄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옷과 음식을 준비하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10명 이상이 된다고 생각하면 잠이 확 달아난다. 궁전에서는 내가 일정을 계획하고 정하기보다는 짜인 일정에 맞춰 움직였다. 그래서 사실 편했다.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사실 크게 어려운 것도 없었다. 마법 학교에 다닌다거나 저주에 걸릴 일도 없어서 생명의 위협을 받지도 않았고 아빠가 주변국과의 관계를 잘 형성해 놓아서 전쟁이 일어날 걱정도 없었다. 그래서 궁전에서의 삶이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냥 그랬다. 나이가 들자 주변 공주들은 한 명씩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교육들을 받아와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하는지 금방 파악한 듯했다. 나도 그 친구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왔지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한국엔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좋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2주 전에 사서 얼려놓은 식빵이 보였다. 오늘 아침은 토스트나 해 먹어야겠다. 공주들은 요리를 못할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던데 나에게 대입하면 그 편견이 맞다. 나는 요리를 못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유튜브가 있다. ‘자취생’과 ‘요리’라는 단어 사이에 집에 있는 재료를 넣어 검색을 하면 온갖 레시피들이 다 나온다. 오늘은 자취생 식빵 요리라고 검색해 보니 대파 토스트를 만드는 방법이 나왔다. 이번에도 그 남자가 올린 영상이다. 아예 그냥 구독을 해버려야겠다. 다행히 냉동실에 얼려놓은 파 조각들과 마요네즈, 한 개 남은 계란이 있다. 영상을 보며 열심히 따라 하다 보면 나도 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매일 쓰는 접시를 하나 꺼내 그 위에 완성된 토스트를 올렸다. 세바스찬이 다가와 코를 킁킁 댄다. 손으로 토스트를 집어 먹으려다 내려놓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왔다. 잊지 말자 나는 공주다. 나이프로 토스트를 썰어 입 안에 넣었다. 구운 파에서 단맛이 쭉 올라온다. 마요네즈를 많이 넣어 조금 느끼하긴 하지만 먹을만하다. 요리를 하니 그래도 뭔가 해낸 것 같아 기분이 좀 낫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이거 다 먹고 나면 나는 뭘 해야 할까…..
아 맞다. 넷플릭스에 새로운 드라마 나왔다는데 오늘은 그거 정주행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