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수다. 한국에서는 직업이나 일자리가 없는 사람을 그렇게 부르던데. 그게 바로 나다.
그리고 나는 공주다.
“공주 출신이신데 왜 한국까지 와서 일을 구하시는 거죠?”
면접관들이 매번 첫 번째로 하는 질문이다.
“공주출신이라고 꼭 공주로만 살란 법 있나요?”
내 대답을 들은 면접관들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어 번 정도 끄덕인다.
“그러면 저희 회사에 지원하신 이유가 뭐죠? 공주로서의 삶이 아닌 회사원으로서의 삶을 선택하신 이유 말이에요.”
“저는 어릴 적부터 이 회사의 제품들을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제품을 사용할 때마다..”
몇 번이나 연습했던 답변을 유창하게 말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좀 전의 끄덕임과는 조금 다른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면접관들은 내 옆에 앉은 사람에게 시선을 보낸다. 이 회사도 불합격이겠구나.
처음 불합격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나는 흥미로웠다.
“어쭈. 이렇게 가차 없이 떨어뜨린다는 거지. 누가 이기나 보자.”
다른 공주들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인지, 슬프거나 아쉬운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의 시련은 어느 공주나 겪게 되니까. 다른 공주들은 칼에 찔리기도 하고 불에 데이기도 하는데 이 정도 불합격 문자는 뭐 아무것도 아니지. 고향에서 먹던 닭고기와는 차원이 다른 치킨을 한 마리 뜯으면 사르르 잊히는 글자였다. 그런데 이 글자를 75번째 보게 되니 이젠 치킨 한 마리로는 부족하다.
고향에서 나는 아주 평범한 공주였다. 사이좋은 부모님 밑에서 행복하게 유년 시절을 보내고 좋은 음식, 좋은 옷을 입으며 자랐다. 다정하지만 엄격한 선생님과 부모님께 가정교육을 착실하게 받은 아주 착한 공주. 친구들은 다들 공주로서의 삶을 착실하게 살아갔다. 루신다 왕국의 공주는 운명의 왕자를 어린 나이에 만나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왕비로 살아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탈리프 왕국의 공주는 소꿉친구였던 신하의 아들과 수많은 시련 끝에 결혼을 하고 아빠의 왕위를 물려받아 왕국을 다스리고 있다. 참 대단한 친구들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주들은 모두 왕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왕비가 되어야 한다는 고지식한 편견이 있었는데 요즘엔 그 편견도 깨진 지 오래다. 결혼 생각이 없는 공주들은 세계를 누비며 큰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하고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삶을 사는 공주들도 많다. 어렸을 때부터 관리를 잘 받아서인지 외모나 끼가 출중한 공주들이 많아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은 편이다. 어떤 공주는 유튜버로 활동하며 어린이 대상 유튜버 중에 구독자 수 1위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로망을 모두 충족시켜 주었단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공주들과 다 알고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들 나름대로 공주로서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 공주들은 대부분 어딜 가나 주목을 받는다. 공주만의 아우라가 있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나도 그런 삶을 살 줄 알았다. 착하게 선하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면 공주들은 다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는 있다. 내가 그 예외가 될 줄은 몰랐지만. 공주가 백수라니 그것도 나이가 꽤 많다. (나이는 아직 비밀) 그래서 나는 한국에 왔다. 백수가 많은 나라니 공주가 백수여도 괜찮겠지란 마음으로.
지이이잉
핸드폰에 진동이 울린다. 메세지함을 열자 76번째 불합격 문자가 보였다. 오늘은 치킨으로는 안될 것 같다. 육회에 소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