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도 로시와 이탈리아 할머니들
건축에 대한 지나간 에세이들
건축과를 휴학하고 군대에 간 뒤 만 1년이 지나고서 첫 휴가를 받아서 나왔다.
꽤 오래전 이야기다.
부모님께는 죄송한 얘기지만, 부모님보다 친구들이 더 보고 싶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나처럼 군대에 가 있었고, 그 사이 대학원에 진학해 있던 한 친구가 반겨주었다.
저녁에 학교 앞에서 만나자고 하니, 술은 저녁에 마시기로 하고 낮에 어디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이탈리아 문화원이었다. 한남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에 로마대학에서 온 어느 건축과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많지 않은 청중 속에 군복을 입은 시커먼 군인이 나 밖에 없었어서 주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강연의 주제는 알도 로시(Aldo Rossi)의 작은 공소 작품이었다.
공소란 담임 신부를 상주시키기에는 신도수가 너무 적은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성당이다.
주일에는 큰 성당에서 신부가 출장 와서 미사를 집전하고 돌아간다. 우리나라에도 작은 마을에는 공소가 있다.(그리고 그 작은 공소들이 도시의 큰 성당보다 건축적으로 작품성이 높은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다음에 설명하자.)
알도 로시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하자면, 그는 '어쩌다가 건축가가 되어버린 시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던 표현주의적 건축가이다. 그를 대표로 하는 디자인의 성향을 '신합리주의(Neo-rationalism)'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주세페 테라니를 대표로 하는 이탈리아 모더니즘 전통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새로운 요소를 접목시킨 작가였다. 외형적으로는 원형적인 기하학 형태와 강렬한 색감 도입이 파격적이다.
훗날 구름 낀 평일 오전 아무도 없는 그의 작품 앞에 서서 느꼈던 전율이 생각난다.
그의 강렬한 색채와 침묵하는 매스(mass)는 알바로 시자 루이에라와 같은 남부 유럽의 미니멀리즘 건축가들에게 분명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강연은 알도 로시가 디자인을 전개해 나간 여러 안들을 보여주면서, 각 단계마다 공소의 주인인 마을 신도들이 알도 로시에게 물었던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변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우선 하나는 당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던 알도 로시가 고작 시골의 작은 공소를 설계한다는 사실과 함께 그 작은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 개의 대안을 만들어서 주민들에게 찾아가 설명을 하면서 이해를 구한다는 사실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내가 봤던 선배 건축가들과 교수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두 번째 이유인데, 알도 로시에게 설계안에 대해 설명을 듣고 질문을 하는 신도들과 그 질문들의 수준이었다.
로마대학에서 온 교수는 알도로시의 설계안과 당시의 주민설명회 사진 그리고 질문과 대답을 담은 작은 소책자를 우리에게 나눠줬었다.
놀랍게도 그 사진 속의 질문자들 대부분은 그 마을에 사는 시골 할머니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질문과 대답들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날 저녁 함께 갔던 친구와 한 잔 하면서 나눴던 대화는 기억한다.
저기서 오간 대화를 우리나라 건축과 학부 학생들의 교재로 쓸 수 있을까?
우리가 내린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대학원생들의 교재라면 몰라도.
훗날 수많은 의뢰인과 내 설계안에 대해 대화를 했지만 그날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들었던 수준의 대화는 해보지 못했다. 내 탓도 있을 것이다.
좋은 사용자(건축에서는 소비자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가 좋은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내가 문득 좋은 작품을 마주쳤을 때 '이 건물 주인 참 훌륭하네'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