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농도

by 김관우

<흔적의 농도>


책상 서랍 안쪽에 손을 넣으면 늘 그곳에 닿았다. 짧아진 연필 한 자루. 거의 다 닳아버려 손에 쥐기조차 불편한, 더 이상 글자를 쓸 수 없는 그런 연필.

나는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아니, 버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그 연필로 많은 것을 썼다. 이름 모를 노트에 단어들을 적어내고, 매번 지우개로 문질러 흔적을 없앴다.

그 흔적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종이 위에는 흐릿한 선이 남았고 그 선을 따라 다시 다른 말을 써넣었다.


연필이라는 도구는 항상 불안정했다. 닳아 없어지는 존재, 지워질 수 있는 존재. 그게 좋아서 나는 펜 대신 연필을 썼다.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기록,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시간도 그랬다. 우리는 무언가를 자주 시작했고, 자주 지웠다. 대화를 나누고, 침묵하고, 약속하고, 번복했다.

연필로 쓴 우리의 시간은 흐릿했고, 지워진 자리에 다시 말을 얹을 수 있었다.


“왜 늘 연필로 써?”

그녀가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웃었고, 그녀는 그걸 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말했다.

“이젠 좀 남겨두고 싶어.”


나는 그 말의 뜻을 몰랐다. 아니, 알고도 모른 척했다. 남긴다는 것은 책임지는 일이었고, 지우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여전히, 그 무게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떠났다. 짧은 메모 한 장, 펜으로 적혀 있었다.

번지지 않는 글씨. 나는 그 글씨를 보며 처음으로 연필을 들지 않았다.

그저 손끝으로 종이를 문질렀다. 아무것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서랍 속 연필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짧아진 만큼 무거웠다.

대신 나는 펜을 쓰기 시작했다. 남겨두는 연습을 했다.

하지만 가끔, 펜 끝이 망설일 때면 서랍을 열었다. 그 짧은 연필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연필로 다시 무언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흔적은 농도에 따라 무게를 달리한다. 짙을수록 무겁고 흐릴수록 가볍다. 나는 지금도 그 농도 사이를 맴돈다. 남길 것과 지울 것 사이에서, 연필과 펜 사이에서.


어쩌면 인간의 기억도 그런 것이 아닐까. 지워지는 걸 알면서도 남기고 싶어 하는 것. 남겨지길 바라면서도 지워질 것을 준비하는 것.

그 연필은 언젠가 완전히 닳아 없어질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나는 그것을 버릴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서랍에 조심스럽게 옮겨둘까.


아직 나는 그 대답을 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