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에서 멈춘 시간

by 김관우

〈정류장에서 멈춘 시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사실, 금방 올 줄 알았다.

그래서 서두르지도 않았고 핸드폰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시골길의 정류장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앉아 있는 동안 온몸에서 조금씩 불필요한 긴장이 빠져나갔다. 어깨가 자연스럽게 내려가고 호흡은 배 쪽으로 흘렀다. 몸이 어딘가에 닿아 있다는 감각이 또렷해졌다. 흙길에 발바닥이 얹혀 있고, 손바닥에는 볕이 얹혀 있었다.


정류장은 말하자면 반쯤 투명한 공간이었다. 철제 의자 하나, 투명 플라스틱 지붕, 그리고 누군가 붙여둔 색 바랜 전단지들. 전단지 한 귀퉁이는 바람에 들떠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가 젖은 채로 마른 듯, 마치 오래 전에 울었던 사람 얼굴 같았다.

비 오는 날의 습기 때문에 이미 글씨는 퍼졌고 사진은 흐릿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농협 마트 전단, 한자 가득한 민간요법 알림지, 그리고 “당신도 가능합니다!“라고 외치는 피트니스 센터의 광고.

그 아래에 앉은 나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아도 그저 괜찮다고 느끼고 있었다.


정류장 뒤쪽으로는 약간 휘어진 전봇대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전깃줄 위로 참새 두 마리가 왔다 갔다 했다. 둘이 한참 떠들더니 동시에 날아갔다. 나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늘을 보게 되었다.


나무가 서 있었다.

낮은 소리로 자라난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나무였다.

그 나무 그늘 아래에 할머니 다섯 분이 둥글게 앉아 있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저런 구도를 만든 것처럼 정확히 둥글었다.

그들은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 말끝이 뭉개지고, 웃음이 중간중간 섞여서, 그것은 하나의 긴 음향처럼 들렸다.

아주 오래된 라디오의 희미한 방송 같기도 하고 여름날 천에서 바람 빠져나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거, 거기 집 아직 있나?”

“있지. 마당에 밤나무 아직도 있다 카더라.”

“어머야, 걔가 다시 온 기가?”

“왔다 아이가, 왔다가 또 나가 삤다더라.”

그러고는 다 같이 웃었다. 웃음이 땅 위에 퍼졌다.

그 웃음은 풀밭 위로 흐르는 물처럼 어디에도 닿지 않으면서 다 닿았다.

나는 그 웃음이 참 좋았다. 특별한 정보가 있지는 않았지만 친근한 공기처럼 몸에 스며들었다.


정류장 옆에 핀 이름 모를 꽃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조금씩 기울었다.

꽃잎은 붉은빛에 가까운 분홍색이었고 가운데는 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만 열린 틈이 있었다.

나는 그 꽃의 이름을 몰랐지만 이곳에선 아무도 그런 걸 묻지 않았다. 존재에 대해 묻는 대신, 그냥 본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내 어깨 근처로 해가 조금씩 기어들었다.

한 할머니가 과자를 꺼내셨고, 다른 할머니가 주름 많은 손으로 반을 나눠 먹었다.

그 장면은 마치 낡은 필름 속 한 장면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어쩐지 계속 보고 싶은 그런 장면.


버스는 여전히 오지 않았지만 나는 별로 조급하지 않았다.

그늘은 아직 시원했고, 할머니들의 이야기에는 아직 몇 페이지쯤 남은 느낌이었다.

이야기란 원래 끝나지 않는다. 사람만 자리를 뜨는 것뿐이지.


나는 천천히 가방을 발끝에 내려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바람이 한 번, 반듯하게 지나갔다. 풀잎들이 그 바람을 따라 웅크렸다 펴지는 걸 보고 있으니 나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어쩌면 나는 오늘, 이 버스를 놓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날도 있는 법이다.

버스보다, 그늘 아래 목소리들이 더 먼저 마음에 도착하는 그런 오후.

지나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어떤 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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