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고등학교 때부터 위가 말썽이었다. 불규칙한 수면 시간과 매운 음식에 대한 열정이 차곡차곡 모여 습관성 위염을 만들었다. 아프니까 적당히 먹을만한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유독 긴 이번 설 명절은 명절 푸드를 실컷 먹을 수 있는 적기였다. 이 황금연휴를 앞두고 위가 심상치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명절에 흰 죽만 먹을 수 없으니 월요일 아침 서둘러 내과를 찾았다.
주기적으로 병원을 들락날락해서인지 의사 선생님이 나를 기억한다. 원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선생님이 이번엔 또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고 물었다. 속이 쓰리고, 소화가 잘 안 되고... 전형적인 위염 증상이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위내시경을 찍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반복되는 속 쓰림은 의사 선생님을 불안하게 만드나? 위 내시경을 찍고 정확한 상태를 확인해 보자고 했다. 근데 이제 비수면을 곁들인...
솔직히 위내시경을 잘 몰랐다. 건강 검진을 시켜줄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국가에서 시켜주는 건강 검진에는 위 내시경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나마 티비에서 입에 카메라를 넣는 장면은 보았지만... 그게 어떤 느낌일지 전혀 실감을 못했다. 애초에 비수면으로 내시경이 가능한지도 처음 알았다.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있으니 의사 선생님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비수면 내시경의 장점을 설파하셨다.
-가격도 더 싸고, 훨씬 간편해요.
-물에 들어간 것 같은 답답함이랑 목에 뭐가 걸린 거 같은 불편함 빼면 별 거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거 어깨에 힘만 빼면 돼요.
99도의 물이 끓기 위해 1도가 필요한 것처럼 99% 확신에 1%를 더하기 위해 내시경을 받기로 결정했다. 엄마에게 비수면 위내시경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렸다. 화들짝 놀란 엄마는 괜찮겠냐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에 힘만 빼면 돼."라고 답했다. 시간이 되어 어깨에 힘을 빼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몇 분 뒤 눈물, 콧물, 침 한 바가지를 쏟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인간 존엄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비수면으로 위내시경을 해보니 왜 사람들이 수면을 택하는지 알겠다. 물에 들어간 것 같은 답답함, 목에 뭔가 걸린듯한 불편함. 둘 다 맞는 설명이지만 그 강도가 사뭇 달랐다. 앞에 계신 선생님이 조금 (많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고통 참기 하나는 자신 있는 편이지만 한 번 큰 고비가 왔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만할게요."를 외치려 한 순간, 끝을 알리는 선생님의 말이 들렸고 혼신의 힘으로 어깨 힘을 풀면서 겨우 마쳤다.
주변 사람들에게 비수면으로 위내시경 받은 일을 말하니까 다들 화들짝 놀란다. 어떻게 그걸 견뎠느냐고 묻는다. 머쓱하지만 몰라서 했다. 얼마큼 힘든지 모르니까 겁 없이 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무지가 가져다준 용기 덕분이랄까? 그러나 이제는 안다. 위내시경의 방법과 입안에 내시경이 들어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제정신으로 겪었다. 묵직한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걸 생생하게 느꼈다. 그 느낌을 다 아는 상태에서 다음에도 망설임 없이 비수면으로 하겠다고는... 수면이 비수면보다 5만 원 정도 비싸긴 하지만 비싼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경험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수면을 추천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서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한다. 문장 그대로만 해석한다면 두 문장은 충돌한다. 하지만 두 문장이 의미하는 앎의 대상은 다르다. 세상을 살아갈 때 (보통 지식을) 아는 만큼 보이고, (고통스럽거나 힘든 일은) 모르는 게 약이다. 위내시경의 과정을 몰랐기 때문에 비수면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고, 이제는 알기 때문에 앞으로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과학에서도 중력 이론과 양자 역학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로 나누어 보면 둘 다 맞는 설명이다. 이처럼 양자택일이라는 극단주의에서 벗어난다면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행히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었다. 1%의 의심이 사라지고 100% 확신을 얻었다. 앞으로 어떤 마음 가짐으로 살지 잠시 고민해 봤다. 건강할 때 왕창 먹어두기 vs 건강할 때부터 빡세게 관리하기 식의 대결 구도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왕창 먹으면서 관리하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