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을 내 뒤에 긋는 거야

Ep.4

by 해림

꿈이 생겼다.


서른 살에 스카우트받아 해외로 떠나기. 관상 좀 본다는 사람마다 나에게 역마가 보인다고 하더니... 결국 그리 될 운명이었나? 막연한 바람과 기대지만 꿈이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기분이 좋아졌다. 봄이 되면 앙상한 가지에 작은 싹이 하나 둘 돋듯, 침체된 내 삶에도 생기가 점점 솟아났다. 이 생기를 하루살이로 끝내고 싶지 않아 곧바로 노트를 펼쳤다. 아무 줄도 그어지지 않은 빈 노트에 내게 필요한 것을 하나씩 채웠다. 내 부족함을 인정해야 할 때면 마음이 살짝 아팠지만 부족함은 채우면 그만이니까!




노트에 가장 먼저 적은 건 영어 실력이었다. 전형적인 K-학생으로서 영어 시험에서 고득점 받을 자신은 있지만 영어로 유창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아니 떠듬떠듬이라도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다 할 자신도 없다. >>SPEAK IN ENGLISH<< 모드만 들어가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분명할 줄 아는 말인데 막상 상황이 닥치면 말이 안 나온다. 그러곤 꼭 자기 전에 '아... 이때 이렇게 말할걸..' 하면서 복기만 수차례 반복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스카우트 제안은 무슨 자격 불충분으로 예선 탈락이다. 유노윤호처럼 끝나버렸다 난 시작도 안 해봤는데 할 순 없으니 올해는 반드시 입이 트이리라 다짐했다.


입이 트이려면 말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내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대화 중 마 뜨는 걸 심각하게 못 참는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인공지능이랑 대화할 때도 마를 못 견딘다. 머리로 번역하는 중에 생기는 적막은 도저히 못 견디겠다. "틀려라. 트일 것이다." 너무 공감하고 가장 효과적인 길인 걸 알지만 나에게 오래갈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조금 돌아도 꾸준한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생각으로 구동사 공부를 시작했다.


1월 한 달 동안 교재 1 회독 마치기가 첫 번째 목표였다. 계산해 보니 매일 2과 씩 공부하면 한 달에 1 회독을 마칠 수 있었다. 한 번에 모든 표현을 외우려 하지 않고 책을 10번 돌리자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괴로움 대신 가벼운 마음으로 영어 공부가 가능했다. 가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공부하기가 어려울 때라도 최소한 어제 공부한 걸 복습하려고 노력했다.




마의 3주를 보내고 나니 영어 공부가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2월은 1월보다 강도를 높여 1.5 회독을 목표로 삼았다. 한 번 봤던 내용이라 1 과를 공부하는 시간이 줄었지만 하루에 끝내야 할 양이 늘었기 때문에 꽤 빡빡했다. 하루 정도 밀리는 건 괜찮지만 그 이상 밀리면 메꿔야 할 양이 확 늘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 했던가 집안에 갑작스러운 장례가 났다. 장례 연락을 받고 우리 가족은 무거운 마음으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이 치러진 3일 동안 나는 자리를 지키며 남겨진 이들을 위로했다. 참 슬픈 것은 가족을 떠나보낸 아픔을 추스리기도 전에 현실의 문제로 온전히 슬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당장 장례가 끝난 후, 학원 운영을 대신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픈 마음에 4일 동안 학원에 나가 일손을 도왔다.


장례가 나고 거진 일주일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 잡기가 어려웠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매일 쪽잠을 잤더니 피곤함이 몰려왔고, 그러면서 밀린 일을 처리하다 보니 영어 공부는 어느새 뒷전이 되어 있었다. 이미 상당한 양이 밀려있었고, 뒤숭숭한 마음으로 삶이 산만했다. 결국, 어렵게 쌓아 올린 습관은 꽤 긴 시간의 공백으로 깨져버렸고, 마음엔 한 여름밤의 꿈이 끝난 가을처럼 울적함과 쓸쓸함만이 가득했다. 어렵게 돋아난 생기는 사라지고 다시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하루를 포기할수록 메꿔야 할 양만 늘어난다.




예전에 한 친구에게 해준 말이 있다.

"이전에 너는 출발선 앞에서 주저했잖아. 그런데 오늘 본 너는 이미 출발선을 지난 거 같아. 결승선이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 이미 출발했으니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돼. 혹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느껴지만 다시 출발선을 그어봐. 그리고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거야."


과거에 건넨 말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래. 뭐 어쩌겠어. 다시 1일 차 된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해야지. 하지만 여기에 디테일을 추가하고 싶다. 발 앞이 아니라 발 뒤편에 출발선 긋기. 나에겐 이미 해온 것이 있고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걸 믿고 발 뒤꿈치에 선을 긋는 거다. 어쨌든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째는 더 쉽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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