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감수할 때, 비를 피할 수 있다

by 해림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복도에서 비 냄새가 났다. 복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콘크리트 바닥은 조금 젖어 있었다. 이미 비가 왔다가 그친 건가? 우산을 챙길지 고민이 돼 핸드폰으로 날씨 예보를 확인해 보니, 비가 와도 한두 시간 뒤에는 그칠 예정이었다. 미니멀리스트이자 귀차니스트인 나는 우산을 챙기는 대신 후드에 달린 모자를 믿고 밖으로 나섰다.


막상 밖을 나와 조금 걷다 보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지독한 귀차니즘이 스스로에게 비를 불러들인 것이다. 앞으로 30분은 걸어가야 하는데 어쩐담...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 두 방법 중 하나를 골랐을 것이다.

첫째, 비를 피하기 위해 목적지까지 뛰어간다.

둘째, 주변 어딘가로 들어가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린다.

러닝이냐, 웨이팅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지만 둘 다 크나큰 단점이 있었으니...


목적지까지 뛰어가는 건 힘들다. 하필 또 가는 길에 긴 언덕길이 있었다. 노트북이 든 백팩을 메고 그 길을 뛰어간다? 생각만 해도 괴로웠다. 그렇다고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무리였다. 십 분 안에 그치면 상관없지만, 그 이상 걸린다면? 언제 그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건 시간 낭비이다.


결국 서둘러 걸어가기로 했다. 뛰는 것보다는 비를 더 맞겠지만, 가는 길 중간에 나무가 있으니 최대한 그 아래로 가면 될 것 같았다. 대신 나무가 위치한 방향을 살피며 가다 보니 비가 얼굴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이때 회색 빛 보행자 도로 위로 흥미로운 점들이 보였다. (뭐가 흥미로운지는 사진을 보고 짐작해 보시길!)


IMG_2988.jpg


(이제 답을 공개하겠다.)


나무 아래쪽 도로는 나뭇잎이 비를 막아주어 아직 보송했다. 보송한 곳과 젖은 곳의 차이가 꽤 두드러져 보송한 부분만 지나면 나도 보송할 것 같았다. 또 땅을 보고 걷는 거니까 얼굴로 날아오는 빗방울을 맞을 일도 없었다. 나뭇잎을 우산 삼아 걷다 보니 비를 덜 맞으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더 기쁜 일은 집에 올 때 우산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



내 입장에서 비를 맞는 건 손해였다. 물론, 손해를 피하려면 우산을 챙기는 게 맞지만 귀찮음에 그만 손해가 불가피해졌다. 그다음 현실적인 대안은 최대한 비를 덜 맞는 것이다. 이때 건물로 들어가 그치기를 기다리거나, 적게 맞으려고 뛰어가는 것이 가능했지만 두 방식에는 각각 '시간'과 '고통'이라는 대가가 따랐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두 방법은 너무 큰 비용을 요구했기에 차라리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선택을 하였다.


살다 보면 오늘처럼 불가피하게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이때 주저 없이 손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건 내가 미련해서가 아니다. 원래 인간이 그런 존재라고 한다.


예전에 읽은 영어 지문에 따르면, 사람들은 '얻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것'에 더 민감하다고 한다. 자신의 선택이 손실을 만들었다는 걸 인정하는 건 괴롭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이를 피하려고 한다. 불행히도 이런 손실 회피 성향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손실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주식을 제때 손절하지 못해 더 큰 손실을 보았던 경험처럼 말이다...


최소한의 손해가 최선인 걸 알면서도, 그 손해를 직접 선택하는 건 참 어렵다. 하지만 슬픈 마음을 이겨내고 손해를 감수하는 용기를 낸다면 내 선택의 폭이 다양해질 수 있다. 손해를 피하기 위해 더 큰 비용을 내는 것보다, 조금의 손해를 인정하고 결정한 것이 더 현명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일부러 비 맞으며 살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 맞기를 어느 정도 감수한다면, 우산을 챙기지 않아도 되고, 뛰어가지 않아도 되고, 우산 없이 비를 피할 방법도 알게 되고... 등등 여러 이점이 생기잖아? 럭키잖아!


어차피 우산을 쓰고도 비에 젖는 게 인생인데,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이 정도 비를 맞은 건 남는 장사 아닐까?

keyword
이전 19화평생 모태 취준생으로 살 순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