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모태 취준생으로 살 순 없으니까

by 해림

나에겐 일에 대한 오래된 환상이 있다.


첫째,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어차피 하루의 반 이상을 일해야 한다면, 이왕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 둘째, 돈보다 ‘의미’를 좇고 싶다. 돈 버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가치 있는 일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전파하고 싶다. 셋째, 앞선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일이라면 워라밸을 포기할 만큼 일에 미치고 싶다.


이러한 이유로 졸업 후 아직까지 아르바이트 인생을 살고 있다. 이제는 진짜 취업을 해야지 결심하면서도 막상 운명의 상대(?)를 찾지 못해 지원을 망설였다.



얼마 전, 취업 전에 해외여행이나 가보자는 생각으로 버추얼 아이돌 팝업에서 일주일 동안 일하게 되었다. 집 근처에서 단기로 할 수 있는 일이라 별생각 없이 지원했다.


나는 MD 부스에서 판매를 맡았다. 출근 첫날부터 비가 내렸다. 날씨가 좋지 않으니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을 줄 알았지만, 팝업 입구 앞에 1km 이상 줄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캐셔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간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그때부터 진짜 '계산 지옥'이 시작되었다. "봉투 필요하실까요?, "교환 환불은 당일 현장에서만 가능하세요." 이 말만 수백 번 반복했다. 물 한잔 마실 시간 없이 정신없는 첫날이 지나갔다.


다행히도 둘째 날부터는 첫날만큼 북적이진 않았다. 사람이 줄고, 일도 손에 익으니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손님이 오기 전부터 봉투 꺼낼 준비를 하고, 물건을 담으면서 멘트 처리도 가능해졌다. 그러면서 내 안의 지독한 오지랖이 스멀스멀 나오게 되었다.


한 번은 군복을 입은 손님이 계산대로 왔다. 계산이 끝날 때쯤, 나는 조심스레 손님에게 물었다.


"언제 제대하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손님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10월에 제대한다고 답했다. 그 대답에 나뿐 아니라 내 옆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도 축하를 전했다. 그 순간 무미건조하던 계산대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손님들과 스몰토크를 나누기 시작했다.


장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 바코드를 찍고, 봉투에 상품을 담는 건 똑같은 일이지만 계산대 앞에서 마주한 고객은 새로웠다. 형식적인 멘트 대신 최애가 누구인지, 계산까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한 마디를 물음으로 판매에서 대화로 바뀌었고, 전에 봤던 고객을 또 마주할 때는 내적 친밀도 느꼈다. 생각 외로 재밌었던 일주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일에 큰 환상을 갖고 살았고, 그 환상에 푹 빠져 지금까지 불량 취준생으로 살았다. 하지만 이번에 작지만 은근한 만족을 경험하고 나니, 그토록 집착했던 환상만큼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 하면 좋지. 근데 어떤 일이든 하다 보면 그 안에서 흥미를 찾을 수 있다. (아예 없다면 그건 진짜 아니겠지만) 오히려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해보니 별로라면 그게 더 큰 일이다.


그리고 돈보다 가치?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에 번 돈으로 내 버킷리스트였던 도쿄 여행을 하게 되니 느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돈도 필요하다는 것. 인생의 의미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돈도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 또 돈을 벌어 의미 있게 쓴다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일은 연애와 꽤 닮았다. 누구나 이상형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오히려 완벽한 이상형만 기다리다 평생 혼자일 수 있다. 일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이상적인 곳에서 일하면 좋겠지만 그건 기적에 가깝다. 오히려 다양한 회사를 겪으며 ‘나와 맞는 일’을 찾아가는 게 현실적인 길이다.


또, 상대가 우선인 연애가 건강하지 않듯, 일에 내 모든 자아를 투영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 자아실현은 '일'뿐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이상형을 만날 때까지 연애를 미루지 않듯, 완벽한 일만 기다리다 아무 일도 못 할 순 없다.

평생 취준생으로 살 순 없으니,

얼른 다녀보고 판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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