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리 May 21. 2024

내가 포기한 것들

우리는 언젠가 이혼했을까?


남편의 범죄사실을 알기 이전에도 난 이미 남편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포기했던 부분은 대화였다.

난 더이상 그와의 대화가 즐겁지 않았다.


그의 대화 주제는 늘 한정되어 있었다.

업무와 야구 그리고 가끔 드라마나 게임.

연애 4년, 결혼생활 6년동안 내가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우리 일 얘기말고, 야구 얘기말고 제발 다른얘기좀 하면 안돼? 제발 다른 얘기좀 해보자 우리."

내가 이 말을 하면 그는 더이상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한테 할 말이 정말 저거 두 개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여러가지 일을 가정해보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친구들과도 '로또 1등에 당첨되면 그 당첨금으로 어떤걸 해볼까?' 이런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고는 한다.

친구들과 그런 대화 주제를 가지고 신나게 대화하고 난 후 그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어보면 그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인데 왜 그런 생각을해? 난 그런 생각하기 싫어 물어보지마."

그러면 난 더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점점 그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아졌다. 어차피 물어보면 돌아올 대답은 뻔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즐거운 대화는 내 친구들과 메신저로, 전화통화로 주로 하고 그와는 필요한 대화만 나눴다.


그렇게 난 그와의 정서적 교류를 서서히 중단했다.


그 뒤로는 사소한 것들을 포기했다.

함께하는 집안 정리정돈. 알아서 해주는 배려. 등등

그와 결혼생활을 한 6년 내내 화장실 청소는 내가 도맡았다.

그는 6년동안 화장실 청소를 딱 한번 해.줬.다.

내가 입덧이 심해 락스 냄새를 맡지 못할때 딱 한번.

그것도 내가 부탁하니 비자발적으로.

세제와 청소솔을 양손에 들고

"화장실 청소는 어떻게 하는거야..?" 라고 물어보던 그 인간.

진짜 가슴에서 천불이 나는 것을 꾹 참고 차분히 알려주려고 애쓰던 그때의 내 심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도 태어나면서부터 화장실 청소를 한 게 아니다. 나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설거지 한 적이 손에 꼽는 공주님으로 자랐다. 방청소도 엄마가 해주셨고, 과일 한번 제대로 깎아본적 없었다. 나도 처음부터 다 알고 했던게 아니지만 난 남편에게 물어보지 않고 혼자 시작했었다.

그런데 왜 저 인간은 못하지? 지 잘난척은 그렇게 하면서.

나 열받게 하려고 일부러 저러나?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처음엔 싸웠다. 지겹도록 싸웠다. 그게 몇년 반복되다 보니 지긋지긋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싸우지도 않게 되었다. 그냥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고 화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를 내 울타리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우리는 이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전 07화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