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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숙집 고양이 Apr 24. 2024

친구라는 이름 뒤에 숨은 적-1

딸애와 나의 평행이론

화장실의 제리

딸아이는 코로나 시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던 현재 고1이다. 얌전하고 말수가 적어 중학생이 되고 친구 사귀기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신기하게도 초등학생 때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는데 중학생이 되자 아이는 본격적으로 친구를 사귀는 데 문제를 드러냈다.  아이에게 친구 사귀는 방법을 이것저것  알려줬지만 정작 별 도움이 안 됐던 모양이었다. 아이는 학교 성적도 급격히 떨어졌고, 종일 외톨이로 지내야 했던 아이를 안타깝게 여겨 학교 앞으로 딸을 데리러 가는 일이 잦았다. 담임선생님께 상담도 해보았지만, 친구를 억지로 만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셨다. 사실 처음 말을 건네는 애가 있었는데 무엇이 맘에 안 들었는지 무리를 지은 친구들과 다니며 따돌려지는 과정을 겪었다고 말해주셨다.


그 무렵 청약이 된 아파트로 이사를 해야 했기에 딸에게 사는 동네가 달라지고 새로운 학교로 전학하면 아무래도 친구를 사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주입하며 이사를 했다. 이사하는 과정에서 딸애 방을 치우다 사진을 봤는데 반 아이들과 찍은 사진에서 우리 애만 따로 서 있는 거였다. 순간 울컥 슬픈 감정이 올라왔다. 헛된 줄 알았던 희망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전학 오자 혼자 다니던 친구가 딸에게 말을 걸어주었고, 둘 다 친구가 생기는 아름다운 결말을 맺었다. 다행히 지금은 성격이 조금 적극적으로 변해서 먼저 말을 걸고 친구 무리에 들어 걱정을 덜었지만, 여자애들의 경우 잘 지내다가도 싸우면 곧잘 혼자가 되고는 하니 늘 맘을 놓을 수는 없다.


딸 애의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는 우선은 반절의 성공이다. 아직 1학년이니 아들의 경우는 그런 걱정을 별로 하지 않았다. 남매는 성향이 비슷한데 또래 집단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고 특별히 외톨이가 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섣부른 일반화는 위험하지만 고등학생 둘을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여자로 살아온 반백살의 경험에서 도출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나 여자 집단이 남자 집단보다 적응이 어려운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도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다. 내 속에서 난 아이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말이 많고 붙임성이 남달랐기에 친구가 없었던 경험은 별로 없다. 늘 떼로 몰려다녀 동네 시끄럽다는 말을 듣고는 했는데, 국민학교 5학년에 2학기에 대도시로 이사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언니가 전국에서 일등 하는 등 성적에 두각을 드러내자 선생님이 엄마에게 대도시로 전학을 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소도시에 자라도 되는 정도의 성적을 가진 나와 여동생은 강제로 언니와 묶여 외갓집으로 먼저 옮겨왔다. 엄마와 아빠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남동생과 온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믿고 우리 셋만 시집가지 않은 이모만 이나 있는 외갓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이사는 너무 설레었지만, 막상 전학을 왔더니 우리가 쓸 방이 딱히 없었다. 게다가 우리가 싸야 했던 도시락은 외할머니에게 깊은 한숨만을 안겨주었다. 부엌에서 들리는 한숨은 우리를 아니 언니와 동생이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나에게는 외갓집에서의 눈칫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놀러 왔을 때와 살러왔을 때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지금 내 입장에서 외할머니의 힘겨움은 너무 공감되지만 고작 11살짜리 꼬마에게는 그저 섭섭함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애 봐준 공 없다고    하나보다.


학교는 첫날 많은 관심 속에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환대는 며칠 가지 못했다. 시작은 옛 짝을 좋아했서 내가 온 사실에 불만이 있었던 짝으로부터 였다. 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짝은 책을 보여주지 않았다. 의자를 교묘하게 밀어서 탁자와 의자 사이에 치마 입은 맨 종아리를 부딪히게 해 멍이 들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책가방이 던져져 있거나 밟혀 있었다. 책상과 의자가 복도로 치워져 있기도 했다. 그 상황에도 누구 하나 편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울지 않았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지금도 난 멘털이 약한 면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스타일이다. 좀 솔직하게 그 애를 몰아세웠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그랬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점심시간 아무도 나와 밥 먹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나는 배가 아파 도시락을 안 먹는 척했다. 그 도시락은 할머니의 한숨 섞인 밥이었는데 할머니는 반찬 투정을 하는 걸로 아셨던 모양이었다. 혼이 난 다음부터는 밥을 버리기 시작했다. 실내화 주머니가 쓰레기 통에 있거나 숙제 적힌 복사물이 사라지고, 아무도 내가 발표할 차례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아서 무안한 상황에 처했다. 과제 표가 없으니 준비물을 아침에 와서야 알게 돼 벌을 서거나 혼나는 일이 늘어갔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괴롭힘은 줄지 않았다. 모든 공간에 혼자 남겨졌다. 운동장에서 누군가 던진 실내화를 맞고 쓰러졌는데 어떤 아이가 자기가 대신 사과한다며 낯선 애들의 사과를 받았지만 실내화 던진 범인을 찾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사실 이건 일부러 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 해 운이 정말 없었던 거라고)


학교 앞에 육교가 있었는데 나는 그 위에서 차가 꼬리 지어 몰려 지나 가는 것을 노을을 등지고 하염없이 내려다보고는 했다. 외할아버지가 유난히 말라가는 손녀의 변화를 눈치채시고는 마중을 나오셨다. 친구들과 하교하는 많은 아이들 속에 혼자 육교 중간에서 아래를 보고 있는 손녀를 본 할아버지의 심경은 이제야 어느 정도 가늠된다. 그럼에도 사정을 묻지 않으셨다. 그냥 묵묵히 하굣길을 같이 해주셨다. 딸애를 데리러 갔던 성인이 된 내가 했듯이 말이다.

이모 지인이 우리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어른들의 움직임으로 자리가 바뀌었고, 다른 짝이 생겼다. 그 애는 꼭 나와 점심을 먹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담임선생님의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악몽 같던 한 학기가 끝나고 6학년에 같은 반이 된 전학 때 제일 먼저 말을 걸어주었던 친구가 무심코 따돌림의 경위를 들려주었다. " 네가 말이 좀 거칠어서(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망쳤다는 표현을 잡쳤다고 했다. 이게 욕 같이 들렸다는 거였다) 생긴 거랑 너무 다른 거야. 근데 부반장이  네가 여기에 안 어울린다며. 걔가 좀 그래. " 사투리 때문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왕벌을 만난 거였다. 여자 애들 무리를 움직이는 그 아이는 착한 모범생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왕벌을 대학생이 되어서 만났다.  -2편에 계속

  

외할아버지는 내가 중학생 때  돌아가셨다. 아직도 노을 진 하늘 아래 육교에서 나를 부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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