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남이다
아기였던 동생이 부쩍 자랐다. 걷고 뛰기는 물론 싫고 좋은 감정 표현도 할 줄 알아서 간혹 나에게 덤비기 시작한다. 내가 입던 옷을 물려받아 입고 내 행동을 흉내 내며 빠르게 성장했다.
아빠는 대학 시절부터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쉬는 날이나 여행을 가서는 PENTAX MX로 우리 가족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디지틀 카메라도 없던 시절 매번 코닥, 후지, 아그파 필름을 구입해 끼우고 또 조심스레 빼낸 후 사진관에 인화작업을 의뢰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행복한 순간을 포착하려 애쓰셨다. 어떤 모습으로 현상되어 나올지는 사진을 되찾을 때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진이 멋지게 나와도 B컷 미만의 잘못 셔터가 눌린 모습이어도 비용은 동일하게 지불되었으니 기다리는 시간은 설레면서도 초조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 형제는 나미와 ‘붐붐’처럼 세트로 카메라 렌즈에 포착되곤 했다. 나로선 이 작은 녀석이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었다. 마냥 고분고분하지도 않은데 아빠는 촬영 전 항상 다정한 포즈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셔터를 누르기 전 보통 V를(흔한 손가락 V포즈 요구) 외치셨는데 아직 소근육이 덜 발달한 동생은 한참을 자기 손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두 번째, 세 번째 손가락을 찾아내 펼쳐보지만 이미 촬영은 끝이 났다.
블록놀이(당시 레고가 국내 출시 이전이어서 국산품인 코코블록의 점유율이 높았다)를 할 때에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블록을 집어드는 작은 녀석 때문에 만들고자 하는 것을 속시원히 완성하지 못해 부아가 치밀었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새로 구입한 날에도 동생을 뒷자리에 태워야 했다. 니트 재질의 까끌까끌한 바지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했는데 동생 때문에 늘어난 하중까지 커버하기엔 나의 페달질이 너무 약했다. 혼자 탑승하면 참 빠르고 주행풍 덕에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는데 포기할 줄도 알아야 했다.
엄마가 오토바이의 외형을 모방해 만들어진 내 자전거를 보고는 농담 삼아 “자전거에 기름 넣어야 하겠네~” 했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안장 밑에는 내연기관을 본뜬 플라스틱 구조물이 있었고 그 구조물은 블로우 사출 공법(풍선처럼 공기를 주입해 성형)으로 제작하느라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몰래 주방의 식용유를 가지고 나와 그 구멍에 들이부었지만 체감되는 변화는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매사 장난스러운 내게 장남스러움을 강조했다. 항상 양보하는 마음과 동생을 포용할 줄 아는 미덕을 갖춰 화목한 가풍을 일구는데 일조해야 했다. 때론 엄마 앞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생을 쥐어 박기도 했지만 아빠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자주 소통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아빠는 그리 크게 화난 것이 아님에도 버럭 고성으로 훈육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이것이 참 두려웠다.
아빠 쪽의 남자형제들, 나에게 삼촌들은 하나같이 언성을 높일 때가 많았다. 진심으로 분노해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지시나 요구형의 대화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면 명절에 차례상을 차리기 전 친척들이 모여 TV를 시청하곤 했는데 상이 들어올 때가 임박하자 “TV 꺼!”라고 하거나 밥상머리에서 편식을 하면 “콩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는 식이다.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다가 저런 톤의 고성이 들리면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엉덩이가 4.5cm쯤 공중에 들렸다가 내려오는듯했다. 굉장히 거부감 있는 말투여서 나는 커서 저러지 말아야지 했는데 가끔 여섯 살인 아들과 부대끼다 보면 무심코 그 어른들의 말투가 내 입으로도 구현이 되는 때가 있다. 하루빨리 고쳐야겠다.
아빠는 충청북도 진천에서 나고 자랐다. 아빠는 물론이고 삼촌들과 고모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억양에 충청북도의 사투리가 묻어있다. 나름 표준어로 말을 배운 나는 ‘~~ 했는겨?’하는 이 지역의 말투가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지만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다.
할아버지대 이전부터 진천에 터를 잡고 농지를 소유한 덕에 비교적 형편이 나은 집이다. 아빠와 나이차가 많이 나는 큰아버지 그리고 고모 세 분 아래로 남자 형제가 한 분 더 계셨는데 다섯 살쯤 되는 해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후 할머니가 어렵게 얻은 아들이 바로 우리 아빠다.
아빠가 태어나기 전 농업이 주력인 세상에서 일손으로 쓸만한 사내아이가 더 필요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여성편력 때문인지 할아버지는 본처 외에 다른 할머니를 두었다. 다른 할머니는 이미 양육 중인 아들이 있었고 할아버지 사이에서 아들 셋을 더 출산했다.
어찌 됐든 내게는 다름없는 삼촌들이다. 삼촌 중 한 분은 어릴 적 수면 중에 연탄가스로 인해 기절을 한 일이 있다. 기절한 와중에도 할아버지의 말이 들렸다고 한다.
“자식은 또 낳으면 되니 갖다 버려!”
전쟁통으로 삶이 워낙 각박해서 웬만한 일은 비극 축에도 끼지 못했던 시대 탓이었을까? 사진으로만 뵌 할아버지의 따뜻했던 일화는 들어본 일이 없어 다소 비정한 가장으로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다.
두 집 살림을 책임지고 팔 남매를 양육해야 했으니 가족 간 일상적인 대화가 온정 넘치거나 섬세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아빠를 비롯한 삼촌들까지 종종 버럭 하는 말투가 자연스레 자리 잡았나 보다.
그래서 아빠가 집에 계시면 평소보다 더욱 착한 아이인양 고분고분하라는 데로 잘 따랐다. 동생과 함께 블록을 갖고 놀고 자전에 뒷자리에도 묵묵히 태웠으며 카메라 렌즈 뚜껑이 열리면 요구하는 포즈도 불평불만 없이 취해줬다.
당시의 케잌은 왜 그렇게 맛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키위나 귤 등 신선한 과일로 꾸며진 먹을만했던 생크림 케잌은 90년대 이후에 접했고 그전에는 죄다 유사 버터로 투박하게 덧발라진 케잌이 전부였나 보다. 한 입 베어 물면 부드러운 카스텔라 층과 크림이 자연스레 혼합되는 걸 기대했는데 꼭 중간에 “나 건포도야!”, “난 견과류야!” 하며 마음껏 존재를 표출하는 첨가물들에 의한 이물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너무 느끼해서 더 이상 먹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 예나 지금이나 홀 케잌이 비싼 건 매한가지일 텐데 참 배부른 투정이다.
위 사진의 아파트 놀이터 뒤쪽으로는 지금의 위치와 살짝 다른 이동 전의 1호선 백운역사의 모습이 보인다. 공중목욕탕 굴뚝(빨간색) 뒤로 나온 건설 중인 건물은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산곡 현대 1차 아파트이다. 사료로써 가치가 높은 사진 같으므로 인천시가 비싸게 사 갔으면 좋겠다.
놀이터의 놀이기구는 모두 철제이다. 조금만 용접이 불량하거나 벤딩이 덜 된 마감은 아이들에게 치명상을 안겨줄 수 있는 철기시대 놀이터에서 큰 부상 없이 성장을 했다. 사진으로 보이는 철 난간을 넘어 5m가량의 옹벽을 암벽등반하듯 내려가면 야트막한 산으로 통하는 길이 있고 그 길 옆으로는 철로가 놓였는데 마음만 먹으면 다가설 수 있었다. 가끔은 부모님 몰래 그 루트로 곤충채집을 위한 큰 모험을 강행했는데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은 것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나이 다섯 살이지만 따로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다. 사교육을 위한 학원도 거의 없어서 엄마는 이때까지 가정보육을 했는데 귀찮을 정도로 내가 집요하게 과자 봉지 뒷면을 들이밀며 한글을 물었다고 한다. 머지않아 혼자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이때만 해도 부모님은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고 한다. 고맙게도 이 시기에 요즘과 같은 영어 유치원이 없었다. 부모님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곳에 날 보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얼마 안 된 과거이지만 요즘같이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한 상황과는 달리 마을 하나만 있으면 아이들끼리 잘 크는 때였다.(그러나 툭하면 넘어지고 구르며 멍과 피딱지가 그칠날은 없었던 것 같다) 어느 곳이든 내 또래의 어린이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서너 살 터울까지는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놀이터로 산으로 놀러 다녔기에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엄마들이 자유롭게 차 한잔 나누며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정말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학군지와 일부 신도시에나 가야 아이들을 볼 수 있고 돈 들여 키즈카페에서 아이를 놀게 해도 행여 다른 아이와 츄러블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며 눈을 떼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며 더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