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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계해년

네 식구만의 첫 보금자리

by 김동의

주안 외가댁에서 이사를 했다. 주민등록초본을 발급받아보면 생후 수차례 주소 변경이 있었지만 기억하고 있는 이사는 이것이 처음이다. 당시 주소로 인천시 북구 십정동에 위치한 노란색 계양아파트 A동 105호가 우리 집이 됐다.(지금은 사라지고 다른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단지 앞 고가다리 측면의 계단만 내려가면 1호선 백운역이 나오는 나름 역세권이다. 이 가구는 성공한 중산층의 표본이었을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짜리 공동주택은 방 두 개 화장실 하나 발코니와 다용도실로 구성됐다. 전용면적인지 공급면적인진 모르지만 18평으로 알고 있는데 거실에는 커다란 라디에이터가 한쪽 벽면을 거의 차지하다 시피하고 다용도실엔 세탁기 외에 잡동사니를 잔뜩 쌓아둬서 매우 좁게 느껴졌다.

계양아파트의 평면도와 그 주변


1층이지만 지금처럼 높은 건물이 많지 않아서 볕이 아주 잘 들었다. 발코니와 인접한 내 방을 떠올리면 황금색 햇빛이 풍부하게 들이치던 모습이 디폴트 값으로 저장된 듯하다. 이곳에서 4인 체제의 우리 가족은 1990년까지 거주했다.


당시 한국나이로 고작 네 살. 모든 것이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왔을 때였을 텐데 용량이 차면 새로운 파일이 덮어쓰기 하는 CCTV의 SD카드처럼 남아있던 기억들이 상당량 휘발되었다. 스틸컷처럼 몇 장면만이 남아있어 이곳에 풀어보려 한다.


소파에 두 살 베기 동생과 놓여있던 나는 등받이에 기대 밖을 보고 있던 아기 뒤에서 구릿한 냄새를 맡았다. 노란 고무줄로 동여매는 방식의 기저귀였으니 악취는 좀 더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어린 마음에 “멍청이!” 하며 동생의 엉덩이를 밀어 버렸다. 소파에서 떨어진 그 아기는 많이 아팠을 것이다.


이 시기에 어느 바닷가로 가족끼리 놀러 갔다. 얼기설기 투박해 보이는 돌담이 인상적인 동네에서 묵었다. 아빠와 단 둘이 돌담길을 나와 탁한 황톳빛 바다를 잠깐 거닐다 돌아와선 찐 옥수수를 모처럼 의욕을 갖고 먹었다. (중학생 이전의 나는 식욕이 많이 없었다.) 아빠 손을 잡고 외출을 하는 것이 매우 이례적이었던 만큼 오래 기억에 남는다.

먹는 모습이 직접적으로 담긴 사진은 없지만 바다에서 돌담에서 촬영된 사진 덕분에 추억을 좀 더 생생하게 재생하는데 도움이 된듯하다.

아빠와 걸었던 이름 모를 바닷가에서


며칠 전 썰물 때 잠깐 들렀던 꽃지해수욕장에서 아이와 함께 갯벌에 가보자는 배우자의 제안을 피곤하단 이유로 동행하지 못한 것이 새삼 미안해진다. 아이는 신이 나서 소라게를 주워 들곤 그것을 암모나이트라고 우겼다던데 내가 함께 했다면 어릴 적 내가 그랬듯 더 오래 새롭고 좋은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싶다.


동생의 존재 때문인지 동생을 위한 아이템이 자주 눈에 띄어서 인지 난 한국 나이 네 살임에도 공갈 젖꼭지를 입에서 뗄 줄을 몰랐다. 요 시기의 사진마다 나의 입에는 공갈 젖꼭지가 물려 있다.

매년 여름이면 사람 반 물 반인 실외 수영장에 가곤 했는데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아빠는 어린 나를 안은채 성인용 슬라이드를 탔다. 급강하를 하며 농도 높은 락스물이 눈, 코, 입으로 들어가서 몹시 괴로웠다. 한동안은 수영장의 미끄럼틀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유아용 슬라이드 위에서 공포에 질린 나를 달래주고 있는 엄마. 공갈 젖꼭지가 더 눈에 든다.


할머니께서는 여기저기 가정을 꾸리고 생활하는 8남매의 집을 일주하셨는데 이 집으로 이사한 후 우리 집에도 찾아와 약 2~3주간 머물다 가셨다. 할머니만의 집은 없어 불편하셨을 수도 있지만 두루두루 자식들과 손녀 손자들을 볼 수 있어서 외롭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20대 초반이었던 엄마 입장에서는 일흔을 넘긴 시어머니의 방문이 긴장되고 불편했을 것이다.

좌측부터 동생, 할머니, 나. 소파 뒤로는 길게 자리 잡은 라디에이터를 위한 공간


할머니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병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땅에 태어나셨다. 갑오개혁 때 조혼의 풍습이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십 대에 시집을 가셨다. 할머니의 시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증조할머니는 성정이 거칠었다고 한다. 심기가 불편하면 가차 없이 귓방맹이를 시전 하셨다고 친척 어른들께 지겹게 들었다.

고된 시집살이와 더불어 슬하에 자식도 여럿 두었다. 이 시절에 가족계획이란 게 있었겠는가. 자연의 섭리대로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고 생존에 성공한 자녀가 다섯(2남 3녀)이다. 사진으로만 봤던 할아버지는 할머니 외에 또 다른 부인을 뒀다. 그분은 출산 중에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 사이에서 아이 셋(3남)을 뒀다.

할머니는 시어머니를 모시며 이렇게 8남매를 거둬 키우게 됐으니 얼마나 삶이 고됐을까. 일찌감치 흡연을 하셨는데 내가 동생의 분유 한 스푼으로 그랬듯 담배로 위안 삼았나 보다.

할아버지께서 꾸린 가정은 당시 꽤 먹고살만한 수준에 속했다. 사업수완이 좋아서인지 물려받은 재산의 힘인지는 나로선 알 길이 없다. 잃을 것이 많아서였을까 6·25 전쟁 중 할아버지는 어딘가로 피신했고 할머니는 집에 남아있었다. 어느 날 총을 든 패거리가 집에 들어와서는 할머니를 끌고 가려고 했다.

“여서 죽이고 가지?”

할머니의 말에 패거리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놓아주었다고 한다. 패거리들이 북한군인지 혹시나 보도연맹 명단을 들고 다니며 예비검속을 목적으로 찾아온 국군인지 역시 알 수 없다. 장남인 큰아버지께서 알고 계실 듯한데 그분도 이미 몇 해 전 돌아가셨다.


일제-전쟁-독재까지 격동적인 현대사의 산증인인 할머니에게 귀한 막내딸로 있다가 시집온 엄마는 철부지에 부족한 점 투성이인 며느리로 비췄을 것이다. 매일 참빗으로 머리카락을 빗고 비녀를 끼운 분의 눈엔 엄마의 풀어헤친 긴 생머리와 때마다 색다른 매니큐어를 칠하기 위해 기른 손톱은 늘 거슬렸고 잔소리의 소재가 됐다.


엄마도 이에 굴하지 않고 몇 년을 버티며 밥하고 설거지, 빨래하고 청소하는 모습을 보이니 이후로는 할머니도 긴 손톱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지금도 엄마는 긴 손톱은 유지 중인데 이제 여섯 살 된 손자가 볼 때마다 세균이 많을 거라며 깎으라고 한소리 한다. 그러나 손자 말도 소용이 없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머물 때면 내 방에서 함께 지냈다. 동이 틀 무렵 할머니는 일어나자마자 발코니 문을 조금 열고 솔담배에 불을 붙이셨다. 살짝 삐그덕 대는 샷시 때문에 잠귀가 밝았던 나는 덩달아 잠에서 깼다. 산과 가까운 곳이라 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선선하면서도 신선한 공기가 방으로 불어 들었다. 나는 담배 연기를 매우 혐오한다. 그러나 당시 할머니의 담배 연기는 할머니 만의 고유한 호흡이 섞여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잠결에 맡아도 그저 일어날 때가 됐구나 했으니까.


담배를 태우시곤 가부좌를 틀고 긴 염주를 양손으로 굴리며 가족들의 무사안녕을 비는 염불을 외셨다. 할머니가 소지한 염주는 비녀와 함께 내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는 물건이다. 긴 염주를 장난감 삼아 휘두르고 깔고 앉으며 불경스럽게 가지고 놀다 보면 술이 달린 다른 구슬들에 비해 큰 구슬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는 술을 양갈래로 넘긴 다음 햇빛이 드는 창가로 가져가 자세히 보고는 나더러 따라서 해보라고 하신다. 큰 구슬엔 작고 투명한 구멍이 있는데 그곳을 가까이 대고 보니 석가모니 그림이 있었다. 얼마나 신기하던지 염주가 눈에 띌 때마다 보고 또 봤다.


할머니를 따라 우리 가족은 곳곳의 절을 방문해서 다양한 모습을 한 불상과 경내에 가득한 향 내음이 익숙하다. 특히 사찰의 나무 마루에 앉아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멍하니 내가 아닌 주변이 돌아가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참 좋았다. 어른들을 따라 나도 모든 걸 잘되게 해 달라며 절을 했지만 불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부처님 오신 날 이름을 적어 연등을 달아본 것 외에 불교 행사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묻거나 서류에 종교를 기재할 일이 있을 때에는 망설임 없이 ‘무교’를 선택한다.


종교의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 극락 혹은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함일까. 어느 종교든 깊게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인류에게 보다 더 인간답고 서로 사랑하며 평안한 삶을 살게끔 이끌고 돕기 위해 싹텄으리라 생각해 본다.


나의 아들이 훗날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 존중해 줄 것 같다. 다만 종교를 빙자하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집단에는 절대 관심을 보이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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