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더니 40대에 들어서 크고 작은 변화가 제법 있다. 우선 점프력이 현저히 낮아졌다. 제자리 점프하면 백보드에는 손 끝이 닿았는데 이제는 어림없다. 10대, 20대 시절에나 부렸을 객기로 신체를 혹사하다간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기 십상이다.
절대 살이 찌지 않는 선택받은 체질이라는 믿음은 진작에 깨졌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운동하지 않으면 혹독한 벌이 예고된 사람처럼 전과 같이 야식을 즐기거나 과식한 뒤 긴장의 끈을 놓으면 바로 몸에 상응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김치만두 8인분을 혼자 비운 중학시절, 취킨 한 마리는 기본, 이마트 피자 한 판을 혼자서 해치우던 이야기는 이제 찬란했던 추억에 갇힌 아재의 영웅담이 되어버렸다. 몸에 이롭지 않다고 소문난 먹거리를 섭취하면 소화하기도 힘들고 탁한 피가 뇌로 들어와 두통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였을까. 평생 저런 걸 왜 먹나 싶던 것들을 찾는다. 더덕구이가 너무 좋다. 한정식 집에서 나오는 수많은 이름 모를 나물들에 손이 간다. 과일로 가볍게 끼니를 때워도 아쉽지 않다. 락토핏과 오메가3 복용은 매일 치르는 의식이 됐다.
식도? 기도? 그 어디쯤이 불편해졌다. 천식 환자와 같이 수차례 헛기침을 반복한다. 그 소리에 배우자마저 참다 지쳐 한숨을 쉰다. 의사에게 가 보니 역류성식도염이란다. 커피를 멀리하고 식사 후에 눕지 말라고 당부한다. 커피는 마시지 않으면 되는데 소파가 없는 우리 집에서 식후 일정시간 꼿꼿이 앉아있거나 서 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남의 일로만 여겼던 비염도 미세먼지 상황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찾아와서 삶을 힘들게 한다. 손이 잘 닿는 곳에 용각산을 둔다. 은색 원통의 소리가 나지 않는 그것. 한 스푼 털어 넣으면 외할아버지에게 많이 풍겼던 은단향이 입안에 가득 퍼짐과 동시에 가래나 콧물이 좀 나아진다. 명약이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가 있다.
사십 대의 비자발적 변화는 신체 영역에 한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친한 친구와 PC게임을 즐겨하거나 웹툰만 보던 내가 평생 하지 않던 글쓰기에 손을 댔다. 가족이고 친구고 삶이 바쁘단 이유로 연락조차 없는 내가 여유시간에 글을 쓰다니 뭔가 크게 잘못된 것만 같다.
내 인생에 글쓰기에 열을 올렸던 때가 언제였을까. 국민학생의 일기 숙제, 취업 준비생의 자기소개서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싫었다. 억지로라도 책을 쥐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엄마가 가끔 인용했던 안중근 의사 말씀에 따르면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다. 내 입 속에 바라쿠다와 같이 수많은 가시가 돋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책과는 거리를 뒀다. 학창 시절 국어가 싫었다. 난독증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모의고사나 수능의 언어영역은 나의 등급을 낮추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고등학교 시절엔 별도로 문학이란 과목도 있었다. 학교에는 소수의 운동부가 존재했고 그들은 밤낮으로 운동만 하느라 거의 모든 수업에 열외였다. 꼭 그러진 않았겠지만 그들이 맨 뒷 등수를 채운다고 가정해도 내 문학 등수는 그들 중 최소 두세 명보다도 낮았다.
브런치스토리의 다른 작가들의 글을 보면 평생 글과 함께하는 습관을 지닌 나와는 결이 다른 인생을 걸어온 부류로 느껴진다. 다들 박식하고 글은 세련되면서도 흡입력 있다. 자판기 버튼을 누르면 글이 탁! 나오는 사람들 인양 다작을 매주 연재하는 분들도 있다.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뚜렷한 목적의 글을 쓰려고 브런치스토리에 가입했다. 건축 과정에 축적된 분노를 원동력으로 그렇지만 조금은 공익적인 취지로 쓴 「약이 되는 집짓기 후기」, 아이의 불편한 행동을 거울치료하기 위한 「버르장머리를 위한 관념동화」가 그 예다.
그런데 유명인도 아니고 남들에게 내세울만한 족적을 남기지도 못한 나 같은 이가 ‘인생관찰기’라는 타이틀로 자서전 비슷한 글을 쓰는 것은 매우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은 아직 어린 아들에게 언젠가 내 속 깊은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함이다.
2016년 아빠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2년여간 병상에서 고생하다가 2018년 돌아가셨다. 쓰러지기 직전 새로 이사한 집의 이삿짐을 홀로 쉼 없이 정리하고 계셨다. 내가 킨텍스에서 사 온 연수기 기능이 있는 샤워기 헤드가 보이지 않는다며 연락을 주셨을 때 한참을 성질을 내다가 통화를 끝냈는데 그게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왜 그리 날을 세웠는지 좋게 이사한 날에 짐정리도 돕고 쓰레기도 옮겼으면 좋으련만 새 집 매매계약서에 도장 찍는 걸 확인하곤 바로 자취방으로 와버렸다. 후레자식이다. 공인중개사와 매도인 사이에서 잔금(매매대금의 절반은 내 명의의 대출금이다)을 치르며 필로티 주차장 구석에 들이치던 한 줄기 햇살 아래 아빠의 흐뭇한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을 돌아보자면 아빠가 그렇게 된 2016년은 내가 화학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수십 년 지기 친구들조차 “의외다”, “갑자기 안 하던 짓 하고 그래” 할 정도로. 학창 시절 반장 경험도 전무했던 사람이 노조활동을 하고 출제빈도가 극히 낮았던 근현대사를 파고들며 조금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였다.
아빠는 쓰러지기 전 아주 늦은 사춘기가 온 듯한 아들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아주 가끔 내가 일찍 퇴근해서 저녁식사를 함께 할 때면 틱틱댈 거 알면서 뉴스에서 회자되는 소재로 말 붙이길 시도했다. 대화는 이내 끊기기 일쑤다. 늘 그것도 아주 단답형으로 종결형으로 아들놈이 마무리 짓고 밥상머리에서 일어섰으니까.
좀 더 살아계셨다면 그때보다는 더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을 텐데. 세상사에 대해 아빠에게 내 생각도 이야기할 줄 알고 회사 생활이나 결혼 생활, 육아에 대해 할 말도 있었을 것이다.
아빠는 평생을 근로소득자로 살았다. 오랜 기간 주 6~7회 인천에서 강남 삼성동까지 새벽부터 새벽까지 자차로 출퇴근을 하느라 대화뿐만 아니라 얼굴 볼 일이 적었다. 어릴 적엔 서먹해서 다 커서는 불편해서 아빠와 오래 대화해 본 기억이 없다.
이러한 결핍이 이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아빠의 생각들이 궁금해졌다.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며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지 난 전혀 알지 못한다. 일기라도 존재했으면 칼로 베어낸 듯한 단절감은 덜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인생의 큰 굴곡 없이 평범하게만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며 나의 생각들을 내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고혈압도 가족력이라던데... 꼭 그 때문은 아니더라도 한 치 앞을 모르는 내일을 아주 조금이나마 대비해두고 싶다.
아내도 아닌 아들을 위한 글 그것도 딱히 이목을 끌만한 소재도 없는 도에 지나치게 개인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평생 다 볼 수는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2025년 현재 누가 볼까 싶다. 아들조차 커서 이 글을 읽어줄까? 그저 시간을 할애하여 단 몇 문장이라도 봐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