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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임술년

기억의 시작

by 김동의

잡기억력만 좋은 편임에도 이때의 기억은 극히 일부만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당시의 나를 둘러싼 어른들 위주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제 30대 초반인 아빠(1952년생)는 너무 이른 나이에 이별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거의 없나 보다. 나이차가 꽤 나는 큰아버지 도움으로 어렵게 학사과정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며 전월세를 전전하다가 인천 주안동에 있는 '주안 할먼네'로 불리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댁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지금 지도에서 그 집의 위치를 찾아보라 하면 어렵겠지만 집의 구조 정도는 알고 있다. 붉은 벽돌조적의 옥상이 있는 단층주택. 성인 키만 한 담벼락과 이어진 철대문을 열면 큰 미닫이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있어 널따란 마루가 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돌이켜 보면 당시 가세가 많이 기운 외가댁치고는 꽤 괜찮은 주택이었다.


유하다 못해 너무 무른 외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직업은 의외로 경찰이었다. 6·25 전쟁 당시 징병되어서 전투가 벌어지면 ‘만날 도망 다녔다’ (북쪽이 고향이어서인지 몇몇 단어에는 특유의 억양이 묻어 있었다)는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와 갓난 딸(이모)과는 떨어져 먼저 부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경찰일을 하며 외할머니와 이모를 기다렸다. 오랜 기간 나타나지 않자 잘못된 걸로 알고 모아놓은 돈으로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재산을 거의 탕진했을 때 즈음 외할머니가 이모와 함께 외할아버지 앞에 나타났다.

2남 2녀 중 막내인 우리 엄마(1960년생)도 외할아버지가 밤이고 새벽이고 전화를 받으면 긴급 출동하는 모습을 봤다. 미루어보아 외할아버지는 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경찰일을 유지해 왔나 보다. 생전에 “내가 맘만 먹으면 경찰서장도 해 먹고 내려오는 건데” 하는 말씀도 하셨다. 너무 힘드셔서 경찰일을 관두신 듯하다.

이후 주유소를 운영하셨는데 이게 돈이 좀 됐다. 덕분에 엄마는 어릴 적엔 근사한 이층 집에 살았고 기사 딸린 승용차를 타고 등교하는 게 오히려 창피해서 일부러 교문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내려 걸어갔다는 일화를 잊힐만하면 되풀이한다. 내가 어릴 적에도 외할아버지의 지인이 ‘소장님’이라고 칭하는 걸 들었을 정도이니 사업이 번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호사다마라고 외할아버지가 주유소를 하나 더 운영해 보라는 직원의 권유에 목돈과 함께 신사업 전권을 그에게 맡겼는데 그가 잠적해 버렸다.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주유소를 처분하고 하는 사업마다 족족 말아먹었다. 사업 실패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성격에 그 원인을 둔다. 예를 들어 식당을 운영하면 지인들을 모조리 데려와 “아~ 다 먹어~" 하거나 가게를 하면 "아~ 다 가져가~"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좋은 게 흠으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외할아버지는 이후로도 끊임없이 생계를 위해 뭔가를 하셨고 그중 내 기억에 남는 건 ‘오락실’ 운영이다. 1985~6년 경으로 기억하는데 오락실 사장이 주로 맡은 업무는 지폐나 동전을 50원짜리로 교환해 주는 일(당시의 게임은 1 coin이 50원)이다. 업무 편의를 위해 미리 50원짜리 동전을 2개씩 짝지어 오락실 안의 작은 방 문 앞에 두었는데 그마저도 중간중간 외할아버지께서 조는 틈을타 손버릇 나쁜 아이들이 죄다 훔쳐가기 일쑤였다.

외할아버지는 오락실을 접은 후 뚜렷한 직업을 둔 일이 기억에 없고 점점 더 형편은 악화되었다.


마루에 올라서서 우측은 아빠, 엄마, 나 그리고 동생이 머물던 방이 있고 그 방을 나오면 기형적으로 기다란 화장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좌측은 안방이고 안방과 마주한 주방이 인상 깊다. 주방은 거실이나 다른 방에 비해 바닥 단차가 매우 컸으며 심지어 마당보다도 더 낮은 곳에 위치했다. 마루와 연결된 작은 쪽문과 별도로 신발을 신어야만 출입이 가능한 주 출입구도 있다. 단열 따윈 안중에 없는 차디찬 주방에서 외할머니는 연탄을 갈고 밥을 지으며 설거지를 하셨다.


주방이 인상 깊었던 또 다른 이유는 요 시기에 내가 쇠젓가락을 쥔 채 벽에 위치한 콘센트 구멍에 쑤셔 넣었다가 꽤 찌릿한 충격에 적잖이 놀랐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저지른 일이지만 아직도 의문이다. 나는 왜 무사했을까? 지금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110V 콘센트여서 일까? 나에게 어떤 면으로든 문제가 있다면 이 사건이 일정 부분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굳게 믿고 있다.

당시 주안동 외가댁의 구조


똑같이 신발을 신어야만 이동할 수 있는 곳이 당시로선 나름 혼기가 꽉 찬 작은 외삼촌이 머무는 방이다. 굳이 따지면 사랑방 같은 곳을 외삼촌이 사용하고 있었고 방문을 열면 홀아비 냄새를 찌든 담뱃내가 억지로 누른듯하면서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그런 공기가 감돌던 곳이다.


작은 외삼촌 방은 1985년경 나에게 있어 판박이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장소이기도 하다. 위 그림에 있는 가게에서 '왔다껌'을 자주 구입해 씹었다. 내용물만 빼내고 껍데기는 버렸는데 외삼촌은 이걸 왜 버리냐며 조심스레 껌 포장지의 비닐을 벗기고는 손톱으로 문질러 판박이의 사용법을 알려주셨다. 판박이의 캐릭터는 유행하던 외화 V의 등장인물 들이다. 안면 일부가 벗겨져 너덜거리면 진녹색의 속피부가 드러나는 꽤 충격적인 장면이 동심을 흔들어 놨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이애나 말곤 기억에 남은 캐릭터는 없다.


외할머니는 한동안은 나에게 작은 외삼촌을 사우디 삼촌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70년대 후반~80년대 초 중동 건설 인력 붐이 일 때 사우디애러비아에 다녀온 이력이 있다. 외가댁이 가세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큰 외삼촌은 대학에 진학하길 희망했다. 그럴 여건이 안 됐는지 외할아버지는 단호히 반대했고 절망했던 큰 외삼촌은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일찌감치 그런 광경을 본 작은 외삼촌은 이참에 돈이나 벌자는 심산으로 머나먼 중동행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어린 나에겐 넓게 느껴졌던 회색빛의 시멘트로 미장된 마당에는 외할머니 감성으로 가득한 텃밭이 담장 쪽에 있었다. 텃밭에는 여러 작물을 키우셨는데 길쭉한 호박이 지지대를 휘감아 벽을 타고 지붕까지 이룰 정도로 넓게 퍼져있고 마당 곳곳에 선인장류의 크고 작은 화분들이 많았다. 텃밭 끝으로는 실외 화장실로 사용 중이거나 리모델링을 거쳐 창고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 위로 옥상에 오르는 계단이 위치했다.


1987년 외갓집이 간석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마땅한 놀거리가 없던 나는 별다른 의도 없이 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서 지금까지 잊히지 않았다. 난간이 따로 없는 계단을 중간쯤 오르면 높게만 보였던 담장도 내 발 밑에 있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주안 할먼네 마당에서 찍은 엄마, 나 그리고 동생


햇수로는 2년 실제 기간으로는 18개월 차이가 나는 내 동생의 등장은 내게 좋은 기억만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내가 즐겨 탔던 유모차는 그에게 넘어갔고 그를 위한 젖병 속 분유는 너무 탐이 났지만 정당하게 배분되는 내 몫은 없었다. 엄마는 나보다는 더 어렸던 동생을 안거나 업어줄 기회가 많았는데 이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어부으~~ 바, 어부우우바!” 하며 울부짖어 봐도 동생 놈은 등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시기심은 극에 달했는지 툭하면 눕거나 자고 있던 아기의 눈을 찌르거나 괴롭혔다고 하는데 기억에 없는 걸 보니 엄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난 아직도 우유맛 특히 고소하면서도 담백하고 살짝 달달한 분유맛을 좋아한다. 당시에도 동생의 분유를 자주 훔쳐먹었다. 하얀 플라스틱으로 된 전용 스푼으로 한가득 분유를 입에 털어 넣음으로써 시름을 삼키곤 했다. 정도가 심했는지 누군가 내 손이 닿지 못하게 높은 5단 서랍장 위로 분유통을 올려놓았다.


그럼에도 가장 밑의 서랍부터 순차적으로 빼내며 계단 삼아 올라가 분유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혼자 퍼먹기 미안했는지 나 두 입 동생 한 입 이런 식으로 누워있는 아기 입에 넣어 숨도 못 쉬고 캑캑되는 걸 놀란 엄마가 수습했다. 엄마가 뛰어 왔을 땐 아기가 호흡을 못해 안색이 바뀌니 나도 놀래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 주안집이 있던 곳(구 시민회관을 지난 어디쯤인 듯한데...) 한 번은 들러보고 싶다. 로드뷰를 이용해서라도 지금의 모습을 보고 싶지만 정보를 수소문할 사람이 엄마 외엔 딱히 없다. 아쉽게도 현재는 살가운 태도로 그런 걸 세세하게 물을 사이가 아니다. 특히 내 입장에서는 더 그렇다.


동생에게 뿌우우~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영창 피애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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