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85, 을축년

미소가 사라진 아이

by 김동의

팝페라 가수 키메라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아름다운 목소리는 차치하고 사악해 보이면서도 화려한 메이크업이 자꾸만 생각나 엄마를 졸라 그녀의 LP판을 구입했다. CF에 그녀가 등장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가 TV 앞에 섰다. 엄마는 그녀가 한국인이지만 파리에 산다고 했다. 국가와 도시, 지도의 개념이 없던 나에게 파리는 그저 혐오스러운 곤충인지라 추가로 문의해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전까지는 가정 보육으로 버티다가 처음으로 스승과 제자 그리고 친구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또 다른 사회로 첫 날갯짓을 하게 됐다. 엄마는 나더러 이제 곧 유치원에 가게 된다고 했다. 차내? 찬해? 혹은 찬혜유치원이라고 했는데 어떤 조건이 맞지 않았는지 다른 기관을 급히 알아봤다. 관인 부평미술학원. 이름 그대로 부평에 있는 기관인데 미술학원이란 이름과는 다르게 유치원의 기능도 하는 곳이다. 물론 티티파스(크레파스의 한 품명)를 이용한 그림 그리기 교육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당시의 향기가 인상 깊다. 가죽 느낌의 비닐 냄새로 가득 차있는 부평미술학원에서 지급한 새 사첼백의 냄새. 여러 학용품으로 설레게 했던 학원 앞 문구점의 냄새. 백운역 육교 밑 모퉁이에 위치한 신발가게에서 새로 산 월드컵 운동화의 짧게 지속됐던 알 수 없는 향기까지 새롭게 다가왔다.


토끼반으로 배정을 받았다. 토끼반 입구에는 원아들의 출석부 역할을 하는 사진걸이가 있었다. 출석을 한 아이는 자신의 사진을 뒤집어 걸어놓는 그런 시스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생마다 사진이 필요한데 보통 사진관에서 단독 촬영된 3 ×4 사이즈의 증명사진을 제출했다. 그러나 유독 나만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제출해 그게 몹시 부끄러웠다. 누가 보고 놀리는 것도 아닌데 얼른 뛰어가 뒤집어 놓았다.

제출한 증명사진. 왜 그랬을까?


나는 참 사회생활에 맞지 않는 캐릭터다. 사람과 부대끼고 치이며 에너지를 빼앗기고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가 남들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잘 먹지 않으니 체격이 왜소해 장난기 짙은 아이들의 숄더챠징에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워낙 내향적인 성격 탓도 있지만 눈치도 없고 말귀가 밝은 편이 아니어서 더 그런 것 같다.


이전에는 내가 저렇게도 웃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띠며 촬영된 사진이 많은데 이 시기를 시작으로 웃음기가 사라진 사진이 대부분이다. 무표정을 넘어 침울해 보인다. 활짝 웃던 입꼬리는 축 처져 ‘ㅅ’ 자 형상이 되어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안면 근육들의 움직임이 거의 없다시피 해 모처럼 미소를 보이려면 광대근에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했다.


웃을 줄도 웃길 줄도 모른다. 지금도 배우자가 사진 촬영을 할 때 좀 웃어보라고 주문을 해서 억지로 웃어 보이면 결과물은 처참하다. 조소와 비아냥으로 길들여진 아재의 웃는 모습이 기괴하다. 바로 삭제 버튼을 누른다. 따로 묻지는 않았지만 배우자는 입꼬리 교정기도 있다고 알려준다.


엄마가 어디선가 잠옷을 사 오셨다. 속옷이나 그냥 잡히는 대로 입고 자다가 처음 잠옷을 입으니 꽤 있는 집 자식처럼 보인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새 잠옷을 입은 채 동생과 흥겨운 춤을 추듯 몇 번을 안방 침대를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단추도 많고 소재가 조금 두꺼워 잠옷으로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새 잠옷을 입고


관인 부평미술학원에서 여름캠프를 간다고 한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친구들과 1박을 해야 하는 미션을 완료해야 한다. 최악이다. 배낭 가득히 수영복과 잠옷 수건 등을 넣고 집과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하며 계획된 프로그램을 온전히 수행해내야만 한다.


역시 당시에 촬영된 내 사진들은 밝지 않다. 숙소 옆에 있던 비에 젖은 미끄럼틀을 멋모르고 타다가 바지가 축축해졌지만 여벌 옷은 없다. 종일 찝찝했는데 친구들과 붙어서 자야 하는 것도 모자라 함께 덮은 이불의 끝자락에 누워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시무룩 캠프 시리즈


다음날도 비가 살짝 내리다 그친 흐린 날이 이어졌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사진 기사님이 반 아이들의 개인 촬영을 시작했다. 아침 공기가 차게 느껴져 더 피로하고 불편했다. 유독 내 사진만 두 차례 촬영을 했는데 한 장은 정상적인 모습, 또 다른 한 장은 여장을 시킨 모습이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긴 헤어스타일 때문에 선생님께서 웃자고 생각해 낸 일이었겠지만 종일 컨디션이 좋지 않던 나는 무척 치욕스러웠다.


번아웃이 올 때 즈음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삼촌이 끌고 온 검은색 현대 마크5(FORD COTINA 5세대 수입 판매된 제품)에 두 가족, 8명이 몸을 구겨 넣고 홍천강으로 향했다. 또래의 사촌들과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 어떤 친구보다도 함께 있을 때 행복감을 느껴 매번 그들과의 만남이 손꼽아 기다려질 정도다.


홍천강에서 즐거운 여름 방학


좋은 사촌들과 물에 몸을 담그고 송사리를 쫓아다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은 거의 텐트에서 숙박을 했다. 한참 덥다가도 새벽녘에는 몸이 살짝 으스스해질 정도로 찬 공기가 텐트로 스며들었다. 강 건너 맷비둘기의 구우 구우하는 소리, 밥을 짓느라 부탄가스가 새어 나오는 소리로 아이들 중 가장 먼저 눈을 떴다. 동생이나 사촌들이 일어나길 바라며 하릴없이 좁은 침낭 안에서 뒤척여야만 했다.


어릴 적 텐트 숙박이 참 잦았기에 캠핑 열풍이 한창일 때 회사 동료들로부터 합류를 수차례 제안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텐트를 치고 에어매트를 불어넣으며 복작복작 작은 코펠에 요리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역순으로 이 일련의 과정을 되풀이해야 마무리가 되는 캠핑은 충분히 맛봤다. 복에 겨워서 그런가 보다. 그래도 난 편히 씻을 수 있고 온습도가 쾌적하게 유지되는 집이 참 좋다.


방학이 끝나고 나의 1985년 후반전이 시작됐다. 치인다. 스스로 이겨내고 적응해야만 하거늘... 같은 반 병원집 아들 보다 키가 한 뼘이나 차이 날 정도로 자그마하다. 토끼반에서 집으로 토껴버리곤 7번 KBS2 방송국에서 하는 ‘꼬마자동차 붕붕’이나 보고 싶다. 인생이 쑥 호빵을 처음 물었을 때와 같이 씁쓸하다고 느껴질 무렵 추석 연휴가 또 나를 살렸다.


큰 집인 청주에 가서 사촌들은 물론 할머니와 숙부, 숙모들도 뵙고 또래의 아이들끼리 마음껏 뛰논다. 각각 큰 집 다섯, 둘째 큰아버지 넷, 우리 집 넷, 작은 아버지 넷, 막내 삼촌 두 식구 이렇게 열아홉 명이 세 방에 나누어 테트리스 하듯 촘촘하게 끼어 자도 재래식 화장실이나 요강을 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도 나는 축제기간처럼 들뜨고 흥분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삼촌들은 줄담배를 물며 고스톱에 열중했고 나를 비롯한 또래 사촌들은 TV 특선에 몰두할 때 이 집 며느리들은 단체 급식 사업장에 채용된 사람처럼 일만 했다. 할머니는 사장이자 고문으로 주방장역의 큰 어머니를 필두로 일사불란하게 차례 음식을 만들고 하루 세끼 식사 준비와 치우기를 반복했다. 명절을 앞둔 엄마의 심정은 100일 휴가 복귀가 임박한 이등병의 입장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우리 김 씨는 뿌리 깊은 양반가문이라며 어른들이 주입하다시피 강조했다. 과하게 푸짐했던 차례상을 돌아보니 조선 후기의 조상 중 누군가가 족보에 손을 댄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하다. 마냥 웃고 손꼽아 기다렸던 명절의 이면을 최근에서야 돌아봤다.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묘는 진천군의 한 야트막한 산에 위치했다. 분주하게 차례를 지내고 아침식사를 하면 삼촌들과 내 또래 사촌들은 성묘를 하러 진천으로 향했다. 성묘를 마치면 그 산과 인접한 마을에 계시는 아저씨댁*에 방문해서 점심식사를 했다. 엄마와 숙모들은 성묘와 아저씨댁에서 점심시간을 하는 이 시간이 명절기간 내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아저씨댁*
진천에 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서 삼촌(A), 세 고모들(B, C, D) 그리고 아버지(G)가 탄생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아들(E)을 낳아 기르던 또 다른 할머니를 만나 그 사이에 삼촌 셋(F, H, I)을 두었다. 후처 사망 후 할아버지는 진천집으로 이들(E, F, H, I)을 데려와 모두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삼촌과 고모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기 시작하며 진천집으로부터 분가를 하자 농업을 하시던 아저씨(E)께서 남아 그 집을 인수하셨다. (호칭을 뭐라 할지 몰라 그냥 아저씨라고 해본다)

진천집은 정말 민속촌에서나 볼법한 볏짚지붕의 초가집이지만 황소 한 마리가 지내는 외양간과 마당이 있는 작지 않은 집이었다. 이 집은 1990 년대 중반까지 유지되다가 허물고 현대식 주택을 지어 아저씨께서 거주하고 계시다.
진천집의 구조


인천시 역세권 주민인 내겐 이곳은 정말 색다른 곳이다. 범람할 듯 넘실대는 벼 이삭을 손 끝으로 훑으며 농로를 거닐고 외양간에 있는 황소에게 볏짚을 먹여보기도 하다가 외로이 묶여있는 작은 흑염소를 만났다. 나는 그를 얕잡아보며 목줄을 잡아당겼는데, 어? 이 녀석 힘이 세다. 목줄을 당겨도 꿈쩍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의 머리로 나를 들이받으려 한다. 난 뭔가 잘못됨을 직감하고 가까스로 몸을 피해서 별 탈이 없었다. 그랬다. 흑염소도 나를 멸시하고 있었다. 40년 뒤 난 이 추억을 모티브로 관념동화의 일부를 창작했다.

작은 흑염소와 일기토


다시 일상이다. 그러나 기다려지는 친구가 생겼다. 토끼반 김소연. 같은 행정동이지만 철로를 사이에 둬 걸어가기엔 다소 먼 곳에서 나보다는 늦게 셔틀에 탑승하는 아이다. 미술학원 공용공간에 있는 나무 미끄럼틀에서 비염기 있는 목소리로 나를 참 따뜻하게 대해줬고 오랜 시간 함께하며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그 아이 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전혀 공격적이지 않고 차분한 모습에 이끌렸다. 조용히 좋아할 것이지 대놓고 동네방네 좋다고 떠들고 다녔더니 소풍이나 부모 참관 행사 때에는 별도로 우리 둘만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관인 부평미술학원 측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린다.

우리 엄마와 소연이네 어머니는 일면식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거실 벽에 ‘두성왕자 소연공주’(나의 개명 전 이름이다)라고 큼지막하게 써놓을 정도로 소연이 노래를 불러대니 소연이 어머니와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았나 보다. 엄마는 소연이가 1999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다고 전한다. 지금쯤 가정을 일구어 잘 살아가고 있을 듯하다.


1985년을 돌아보고 당시의 나와 같은 나이인 우리 아들의 모습을 비교해 봤다. 다행히 아들은 나에 비해 훨씬 사회성 있고 밝게 지내 참 다행스럽다. 내가 소연이에게 그랬듯 아들도 1순위로 소중히 여기는 여자친구가 있다. 그녀의 태도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향후 연애를 하게 되면 꽤 가슴앓이를 할 것 같다.


‘꼭 그 친구가 아니어도 다른 친구와 놀면 된다. 세상에 더 예쁘고 착한 여자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싶지만 그런 고급 스킬이 내겐 없다. 내년에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4화1984, 갑자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