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있는 남자
거의 모든 남아들이 그렇듯 나도 자동차나 로봇 장난감을 좋아했다. 그러나 유독 이 시기에 인형에 애착이 갔다. 애경 섬유유연제 포미 CF에 등장한 귀여운 곰인형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형이 인형을 끼고 있으니 덩달아 동생도 별생각 없이 따라 한다.
엄마는 두 아들을 데리고 파란색 시내버스에 올라 간석동에 위치한 희망백화점(現 올리브백화점)으로 장을 보러 갔다. 통상 엄마의 루트는 지하의 식료품점을 들렀다가 그 앞에 위치한 푸드파크에서 우뭇가사리를 드시곤 지하층과 연결된 외부 수산물 판매점에서 생선을 구입하여 복귀하는 것이다.
어느 날 그 루트를 벗어나 4층에 위치한 인형 판매점에 갔다. 아들이 “포미! 포미!!” 외쳐대서 큰맘 먹고 최대한 비슷한 곰인형과 토끼인형(동생 거. 구색 맞추기다...)을 구입했다. 매장 직원도 긴가민가 했는지 “남자애들 아녜요?” 하며 묻는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집에 돌아와 곰인형을 남몰래 무지하게 예뻐해 줬다.
당시의 희망백화점은 영화관도 갖춘 나름 원스톱 복합 쇼핑공간이었다. 아들 둘에 시달리던 엄마에겐 이 영화관은 시간도 보내고 한숨 돌릴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개그맨 심형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우뢰매 시리즈는 이때부터 이곳에서 상영됐다.
이후 故 김수미 배우께서 박사님으로 등장하는 우뢰매 전격 3 작전까지 흠뻑 빠져들어 관람하고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나는 극 중 심형래가 에스퍼맨으로 변신하는 동작(풍차돌기후 팔을 펼치는)을 틈만 나면 했고 만나는 이마다 묻지도 않은 우뢰매 이야기를 펼쳐댔다. 오랜만에 방문한 나이차가 꽤 나는 사촌누나에게 대뜸 붉은 푸커커와 푸른 푸치치(우뢰매에 등장하는 악역) 이야기를 하니 “얘 뭐라는 거야?” 한다.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보면 에스퍼맨이나 데일리 같은 영웅이 나타나길 바라는 민족의 염원이 영화에 투영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니면 말고’다.
관인 부평미술학원을 졸업하고 산곡동에 위치한 청원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대형버스를 등원차량으로 운영하는 규모가 꽤 큰 기관이다. 비닐냄새 짙은 사첼백 외에도 하절기, 동절기용 각각의 페도라도 지급했다. 원비가 비쌀 텐데 부모님은 과감하게 결단하셨나 보다.
장미반에 배정받았는데 요즘의 유치원과는 달리 6세, 7세가 섞여있는 반이었다. 때문에 여섯 살인 엄마의 동창 아들도 우리 반이었고 그와 같은 나이의 한 여자아이는 내 짝꿍이 됐다. 짝은 약았고 나는 어리숙해, 한 살 어린 그녀에게 매일같이 치였다. 늘 그녀의 지시에 맞게 놀아야 했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도끼눈을 뜨고 들볶는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그녀가 다슬기 같은 큰 코딱지를 채굴한 후 내 무릎에 스윽 묻혔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기랄 최악이다.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다. 1986년 내내 그녀의 헤드락에 걸려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았다.
빔 프로젝터가 비싼 기기였나 보다. 유치원에선 아이들을 무궁화반으로 몰아 만화를 틀어줬다. 어쩌다 보니 빔 프로젝터가 놓인 테이블 앞에 내가 앉았는데 무심코 그 테이블 끝을 한 손을 붙잡은 채 화면을 보고 있었다. 딱히 기기에 문제가 생기거나 화면 송출에 나의 손이 방해가 된 것은 아니었으나 여러 아이들을 통솔하는데 지쳤는지 한 선생님이 하드케이스 동화책으로 내 손을 단두대처럼 내리찍었다. 흐흐 아직도 기억한다 무궁화반 선생님.
연말에는 장미반 선생님마저 재롱잔치 때 빨간 치마를 입히고 캉캉춤을 추게 하는 인원에 나를 포함시켰다. 걸그룹 못잖게 수없이 반복 연습하며 들은 지옥의 갤럽(Galop Infernal)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삼재가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래도 꾸욱 참고 쉬는 날엔 동네에서 착한 동생들과 놀 수 있다. 고은영과 황윤주. 장미반의 무시무시한 그녀와는 사뭇 다르다. 항상 웃으며 역할놀이를 하거나 아파트 단지 안에서 뛰어놀았다. 모처럼 오빠 대접을 받아 감회가 새롭다.
별도의 유치원 숙제는 없었다. 한 장 짜리 학습지인 머리표 ‘아이템풀’을 구독해서 매일 바둑판 위에서 문제를 풀었다. 실질적인 학습보단 짧게라도 책상머리에서 집중력 있는 자세를 익히는데 의의를 둔 듯하다. 일일 학습지였기에 조금 밀리기도 했지만 유치원 생활보다는 이런 학습지 풀이가 더 내 스타일이다. 하지만 나에게 유치원은 싫든 좋든 당연히 가야만 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청주에 살던 큰 고모님 댁 아들 그러니까 나에겐 고종사촌형이 우리 아파트로 이사 왔다. 같은 A동이고 라인도 같은 403호다. 나와는 나이차가 꽤 나는 형으로 결혼해서 아기까지 있는 상태로 입주를 했다. 전자회사에 재직 중이던 아빠는 한동안은 함께 사촌형과 출근을 한 기억이 있다. 좋은 취업 기회가 있어 소개를 해준 듯하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사진 촬영을 했는데 그 사촌형이 내 유치원 모자를 억지로 구겨 씌우고 전시된 박을 허리춤에 끼우며 일부러 내 지퍼를 내렸다. 웃자고 각설이 비슷하게 연출한 것으로 짐작되나 심기가 불편했다. 특히 구겨진 유치원 모자는 좀처럼 본모습으로 돌아올 줄 몰랐기에 더욱 그러했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전화기가 놓였다. 구멍 네 개짜리 전화기용 콘센트가 늘 허전했는데 드디어 나에게도 자랑거리가 생겼다. 게다가 주안 할먼네에서 본 투박한 다이얼식이 아니고 펄이 들어간 유선형의 최첨단 버튼식 전화기이다. 우리 집은 525에 3070, 주안 할먼네는 438국에 3958번. 마냥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외할먼네도 전화해 보고 모르는 번호는 물론 119에도 걸어대니 머지않아 엄마의 제지가 들어왔다. 아쉬운 마음에 툭하면 116번을 눌러 하염없이 시간 안내를 받았다.
서울 하늘 아래 높이 솟은 63 빌딩은 내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역세권 입주민답게 살림살이를 구입하러 1호선 전철을 타고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 갔는데 한강철교를 지날 때면 동생과 앞다투어 금빛 때로는 은빛 찬란한 63 빌딩을 구경했다. 빌딩 안에도 황금빛일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궁금했지만 부모님이 데려가지 않는 걸 보니 우린 못 들어가는 곳인가 보다.
유치원에서 한강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한강도 싫고 공원도 싫었지만 아주 근거리에서 63 빌딩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왔다. 전철에서 볼 땐 슬림하면서 길게만 보이던 건물인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거대하다. 고개를 최대한 젖혀야 꼭대기를 간신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원장님도 장미반 선생님도 보조선생님도 빌딩 안으로 들어가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역시 나는 못 들어가는 곳인가 보다.
TV를 보는데 우리 국민들이 돈을 모아 댐을 지어야 한다는 공익광고와 뉴스가 한창이다. 북한이 강물을 풀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한다. 툭하면 63 빌딩이 1/3 내지는 절반이 잠긴 시뮬레이션 영상을 보이는데 너무 공포스럽다. 동생과 욕조에 물을 채워가며 목욕을 할 때면 서로 경쟁하듯 벌떡 일어서서 “이만큼 잠겨”, “아냐 이만큼 잠겨” 한다. 스스로가 63 빌딩이 되어 침수 상황을 가정해 본 것이다. 이웃들의 성금으로 지어진 댐이 북쪽의 강물을 잘 막아주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