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시작하며 식물을 사들였다.
어릴 적 집에 가득했던 화분들과 함께 자란 나는 식물 키우기에 한창 들떠있었다.
물도 제때 주고 주기적으로 햇빛도 쬐어주었다. 엄마를 떠올리며 아침저녁으로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식물들은 전부 생기를 잃어갔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속상함만 쌓여갔다. 생을 다한 선인장을 마지막으로 당분간은 식물을 키우지 않기로 다짐했다.
창밖에는 주인아주머니가 키우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보란 듯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 싱그럽고도 강한 생명력을 엿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애정을 쏟았음에도 시들어가는 화분들이 마치 내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너 왜 이렇게 예민해?"
이상하게 예민하다는 말은 속 좁다는 말로 들렸다.
무던하고 단순한 사람. 그런 사람을 괜찮은 사람이라 동경하며 나의 사사로운 감정은 전부 예민함에서 오는 거라 치부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난 신경 안 써도 돼.'
습관처럼 괜찮음을 연기했고 겉으로 보이는데 더 집중했다. 작은 일에는 개의치 않은 척하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 스스로를 포장했다.
하지만 감정은 거짓말을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 사이 쪼그라들어 건조하게 메말라갔다. 어디까지 괜찮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당하고 생동감 넘치는 '나'를 원했다. 방법을 몰라 서점에서 자기 계발 에세이를 무작정 구입해 읽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스케치 없이 색칠하는 것만큼 막연했다.
이제껏 내가 나를 너무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을 사유했다.
생각하는 근육의 힘이 없는 내겐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의 질문을 몇 달 동안 고뇌한 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던 내 모습을 발견했다.
예민한 사람을 다르게 말하면 섬세한 사람이다. 나는 예민하고도 섬세한 사람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니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내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니 곳곳에 숨겨져있던 사랑도 보이기 시작했다.
"뭐 하고 있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와 연락 중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친구의 물음이 그날따라 다르게 다가왔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밥은 먹었어?'
'그때 그 일은 어떻게 됐어?'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었다. 심심한 위로나 공감의 말도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 궁금해해주던 친구였다.
나를 향한 모든 물음들은 사랑비가 되어 건조했던 내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처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때 사랑은 자랄 준비를 마치는 게 아닐까.
물을 흠뻑 맞아 반짝반짝 빛나는 창밖의 화분들을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는 그저 식물들을 들여다보고 살펴보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잎사귀는 촉촉한지 흙이 메마르진 않았는지 매일 들여다본 정성들이 이토록 건강하게 식물들을 자라나게 했던 것이다.
온몸으로 싱그러움을 펼치는 화분들이 그 사랑의 결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안부를 물어야겠다.
소리없는 사랑비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