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들려줘야만 하는 이야기.
엄마는 몰랐으면 했던 이야기.
다행히 긴 시간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주사약이 들어가자 나는 곧 의식을 회복했고 그 모습을 본 선생님들이 다시 분주해졌다.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놀란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혈압 등을 체크하며 안정을 취한 뒤 다시 어디론가 옮겨졌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던 것 같다. 이제 됐구나.. 이제 출혈이 멈추겠다..
생각해 보면 안일했다. 조금 불편했지만 참을 만했고, 무엇보다 환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더 아무렇지 않은 척,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아프다는 걸 인지하고 의식하는 순간 정말 " 암 환자"가 될 것만 같아 순간순간 떠오르는 나쁜(?) 생각들을 떨쳐냈다.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렇지도 않다.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외워가며....
수술은 잘 마쳤지만 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 범위에 오를 때까지 경과를 지켜봐야 하기에 응급실에서 수혈을 받아야 했다. 정신이 좀 들었는지 손목에 연결된 주사 바늘의 뻐근함이 느껴졌다.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 담당 선생님이 오셔서 수치를 확인하셨다.
-과장님께서 말씀하신 수치에 조금 못 미치는데.. 제가 한번 여쭤보고 올게요..
잠시 후.. 방긋 웃으며 다시 오신 선생님.
-조심히 퇴원하라세요~~ 나가서도 조심하시라고.. 이제 응급실 오지 마세요~~!!
-네~~~!!! (대답은..)
드디어 엄마를 마주하는 날.
6살, 4살 조카들과 키즈카페를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조금 조심스러운 외출이었지만 내 상황을 알리 없는 어린 조카들이 간절하게 기다렸을 날이란 걸 알고 있기에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들려줘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팠던 내색을 감추기 위해 씩씩하게 걸었다. 하지만 엄마는 속일 수가 없는 일. 먼저 도착해 있던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건넨 첫마디는..
-어디 아파? 얼굴이 왜 그래??
-애들 시험 준비하느라 신경 써서 그런가? 아무렇지도 않은데 뭐~~
-잠을 못 잤어? 얼굴이 핼쑥하네.. 피곤하면 다음에 보자고 하고 쉬지 뭐 하러 나왔어..
-괜찮아~~
나의 계획은 원래 키즈카페에서 잘 놀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천천히, 그렇지만 무겁지 않게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 계획은 언니의 등장과 함께 물거품이 돼버렸지만..
두 조카는 '이모바라기' 인지라 워낙은 내 독차지인데 그날은 내 컨디션을 눈치챈 엄마가 두 조카를 데리고 낚시게임을 같이 해주고 있었다. 그때 사뭇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더니 이내 방긋 웃으며 언니가 물었다.
-너 컨디션이 안 좋지?
-어? 어.. (별일이다. 평소 그렇게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닌데..)
-너.. 임신했어. 확인해봐바..
역시 우리 언니^^
이런 뚱딴지가 세상 어디 있을까.. 수술에 응급실까지 다녀온 나에게 뜬금없이 임신이라니.. 설사 그렇대도 질문은 임신했어? 임신한 거 아니야? 이렇듯 일반적으로 긴가민가하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느닷없이 확신에 차서는 임신했어. 라니!!
언니의 해맑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니야.
-맞다니까.. 내가 진짜 좋은 꿈을 꿨어. 확인해봐바 날짜 봐바 빨리~~!!
-아니라고..
-맞아 확실해 진짜 태몽이었단 말이야.
-넌가보지.
-야~ 죽을래!! 맞아 틀림없어 너 임신했어.
-아니라니까..
피식, 터져 나온 내 웃음이 언니에게 더 큰 확신을 준 걸까? 언니는 점점 신이 나기 시작한 눈치였다. 어떡하지..
-백퍼 임신이야 언니가 기가 막힌 태몽을 꿨다 동생~~
언니는 곧 엄마를 부를 기세로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는 눈치였다.
-수술하고 왔다.
-뭐?
-지난주에 수술했어 나 암 이래. 2주 전 검사에서 발견했고 다행히 진짜 초기여서 지난주에 딱 떼어 내고 말았어. 수술은 잘됐고, 끝~~
-어??
-그러니까 임신이니 뭐니 헛소리 말라고.. 나 임신 아니니까.. 언니가 셋째 보려나 보네~~
우리 언니가 눈물이 많다는 걸 깜박한 내 실수는 여기서 시작됐다.
-무슨 말이야 네가 암이라니.. 네가 왜.. 무슨 암.. 언제? 누가 그래? 그래서 수술을 했다고? 한다고?? 무슨 말이야 그게.......
말릴 새도 없이 언니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사연 있는 여자처럼.. 그것도 키즈카페란 밝고 맑은 곳에서..
키즈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모니터에서 나오는 게임 소리와 푸드코드에서 연신 울려대는 '띵동 띵동' 벨소리.. 각자의 역할에 맞는 소리들이 한데 모여 자유롭게, 평화롭게 들렸다 이내 잠잠해지고.. 언니의 울음소리만 귓가에 닿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참고 있는 우리 언니.. 두 손으로 연신 눈물을 닦으며 무슨 말이든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마땅한 단어도 문장도 떠올리지 못한 채 어깨만 들썩이는 언니는 등을 가만히 두드려본다.
-괜찮다고~~ 수술 잘 됐다니까!! 진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그만 울지? 사람들 쳐다보기 시작하는데.. 아니 그니까 집에서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뭔 임신 소리를 하냐~~
언니도 어이없는 듯 피식 웃음이 터진 그때 엄마가 언니를 발견했다.
-엄마 온다. 그만 울어라.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은 언니를 보고 깜짝 놀란 엄마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한테도 말했어야지. 나도 알아야지. 왜 나만 모르게 해 왜!!!
띠로리~~~
언니는 이 모든 상황을 엄마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거였다. 엄마와 매일 통화하고 언니가 '이거 엄마한테 말하지 마~~!!' 하면 쪼로로 엄마에게 전활 걸어 '언니가 엄마한테 말하지 말랬는데~~!!'까지 다 말하는 나였기에 당연히 엄마도 내 수술을 알고 있고 언니에게만 늦게 전한 거라 생각해 서운하다는 말투로 내뱉은 말이었다.
-야!! 엄마도 몰라!!!
당황한 나, 놀란 언니, 영문은 모르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 엄마.
-무슨 일인데? 뭐를 너만 몰라. 뭐야? 왜 울고 있어?
할머니도 없으니 조카 둘이 할머니를 찾아 종종걸음으로 달려왔고 자기 엄마가 울고 있으니 벌써부터 눈물이 고여 엄마 왜 우냐며 같이 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대환장파티.
-너 때문에 다 망했다 망했어. 엄마 여기 앉아 언니는 애들 데리고 저기로 가라~~
언니와 조카들을 반대편으로 보내고 엄마와 나란히 앉아 그간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듣던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참아봤지만 참아질 리 만무했다. 엄마 손을 잡고 얼마나 그렇게 울었을까..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괜찮대? 항암치료받거나 다른 치료는 안 해도 된대?
-응 엄마. 진짜 초기에 잘 발견한 거래. 다른 치료는 안 받아도 되고 두세 달에 한 번씩 와서 추적검사만 잘 받으면 된다고 하셨어. 나는 진짜 괜찮은데 내가 엄마한테 말하면 엄마는 그 순간부터 자지도 먹지도 못했을 거잖아. 나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는데.. 그래서.. 그래서 바로 말 못 했어. 이따가 집에 가서 놀라지 않게 말하려고 했는데 언니가 이상한 소리 하는 바람에 다 망쳤네.
-그래.. 무슨 일이 있지.. 했어. 꿈에 계속 네가 나오더라고.. 물어보려다 말 안 하는 이유가 있겠지.. 했는데 오늘 너 얼굴이 안 좋아서 속으로 어디 아픈가.. 아팠나..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괜히 오라고 했다.. 얼른 가서 뭘 좀 해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어... 미안해, 엄마가 가족력을 줬네. 줄게 없어서 너한테 그런 걸 줬네.. 엄마가 미안해..(엄마는 13년 전 갑상선암 수술을 했다)
-에이~~ 그런 거 아니다 엄마!!! 내가 아픈 거지. 내가 내 몸 제대로 살피지 못해 아픈 게 왜 엄마 탓이야. 그런 거 아니야 엄마, 그런 생각하지 마 엄마 나 속상해~~
이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 한 어린 두 조카는 맘 놓고 놀지도 못했다. 엄마에 이어 할머니까지 울고 있다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나는 양손에 두 조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모랑 뽀로로 음료수 먹으러 갈까?
엄마와 언니는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누가 들을까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누가 볼까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신나는 동심의 세계 키즈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