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응급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다. 감사하게도..
평상시처럼 지내되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더 잘 자고, 조금 덜 움직이라는 조언과 함께 퇴원을 했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받아 든 병원비 청구서에 적힌 '중증환자'라는 낯선 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쓴 채 펑펑 울었다.
분명 괜찮았는데..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을 거야.. 하면서도 한켠에선 꿈틀댔던 불안감.. 그럼에도 잘 끝마쳤다는 안도감..
집에 오자마자 여러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암 진단을 받고 입원을 하고.. 퇴원하는 그 순간까지 누구보다 씩씩했다고 자부했는데 실은 나도 무서웠었나 보다.
이불속에서 엉엉 울고 있는 내 등을 말없이 남편이 토닥였다. 그 토닥임에 많은 말이 담겨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고생했어. 애썼어. 다행이야.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다행히 불편한 데는 없었다. 이따금 통증이 있긴 했지만 살을 칼로 자르고 꿰맸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는 일.
이렇게 초기에 알 수 있게 된 걸 하나님께 감사하며 밥도 잘 먹고 씩씩하게 평상시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시 일상을 되찾아야 하는 날.
학교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달려왔다. 학원 문이 거칠게 열리며 '딸랑딸랑' 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요란했다.
"선생님~~~!!!!!"
"이제 안 아파요? 다 나았어요?"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우웩!!!!"
"선생님, 숙제 뭐예요? 너무 많잖아요."....
재잘재잘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아.. 내 자리구나...
언제나처럼 하하하 웃으며 유쾌한 수업을 했다.
나는 이곳, 내 아이들을 사랑한다.
이곳에 자리 잡은 지 4년. 나에게 오는 아이들의 성장을 길게는 4년, 짧게는 1년을 지켜봤다.
0명에서 시작한 학원이었다. 획일화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원서와 영자신문을 읽으며 생각을 나누고, 팝송과 애니메이션, 영화 등을 듣고 보면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게 해주고 싶었다. 서툴고 어색했지만 손짓발짓 애써가며, 퀴즈와 보드 게임도 영어로만 하면서 "영어? 까짓, 별거 아니네!!"라는 걸 느꼈으면 하는 마음으로 커리큘럼을 짰다. 문법적으로 정확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나의 바람과 노력은 곧 아이들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원 간판에 전화번호 없이도, 특별한 광고 없이도 우리 아이들을 보고 친구들이 따라왔고 그렇게 학원은 온전히 아이들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학원의 성장과 함께 더 많은 아이들과 더 큰 공간으로 확장이 당연한 듯 싶었겠지만 처음부터 그건 내 계획에 없던 일.
나 혼자 수업하는 작은 공간이기에 많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어 대기하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내가 세운 원칙을 어길 수는 없기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의 아이들과 주어진 내 일에 집중하며 나의, 그리고 아이들과의 아지트를 완성했다.
이틀 후. 평소와 다르지 않은 아침을 맞이한 듯 싶었지만 몸에서 이상 신호가 나타났다. 하혈이 시작된 것이다. 갑자기 시작된 출혈은 조금씩 심해지는 듯했고 앉아 있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걱정스레 쳐다보는 남편에게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달라 부탁했고 상태를 들은 담당 간호사 선생님께서는 가능한 한 빨리 응급실로 오라고 하셨다.
"응급실이요??"
응급실로 향하는 중에도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특별한 통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출혈 탓인지 조금씩 어지럽고 메스껍고 정신이 흐릿해져 갔다. 정신을 붙잡고 응급실에 도착한 뒤 베드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일인가.. 괜찮겠지? 내가 너무 무리했나? 좀 더 누워있어야 했는데.. 아무 쓸모없는 자책과 후회가 몰려왔다.
응급실 담당 선생님께서는 미리 연락받으셨노라며 남편에게, 나에게 필요한 몇 가지를 확인하시고는 이내 주렁주렁 주사 바늘을 달아 주셨다. 주사를 맞는다고 출혈이 멈추는 건 아니었기에 내 환자복과 침대 시트는 빨갛게 변해갔고, 늘 침착하고 차분했던 남편은 담당 주치의 선생님은 언제 오시냐며 안절부절 응급실을 배회했다.
"여보 병원 왔으니까 됐어. 환자 보고 계시니까 바로
못 오시겠지.. 있어봐 오실 거야.. 그래도 병원 왔잖아 괜찮아."
긴장한 탓인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남편에게 병원 2층에 있는 커피전문점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을 사다달라 부탁했다. 남편에게도 잠시 긴장을 식힐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당시 나의 상태는.. 뭐랄까.. 출혈과 함께 장기의 일부분이 함께 나오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많은 양이 쏟아지고 있었다.
응급실 선생님들도 모두 나의 상태에 촉각을 세우고 계셨다. 남편이 나가고 잠시 후.. 수술실로 이동하라는 오더가 내려온 듯 했다.
베드보다 이동이 빠르고 쉬운 휠체어로 가는 편이 좋겠다고 하셔서 나도 그러겠다고 했다. 나를 부축해 주시던 선생님께서 나를 앉히시고 휠체어로 주사를 하나씩 옮기시며 주사를 조절하시던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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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들의 다급한 목소리, 남편의 목소리로 들리는 내 이름.. 눈꺼풀 너머로 정신없이.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들..
모든 순간을, 꼭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은 물속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눈앞이 뿌옇고 흐릿했으며
모든 소리가 웅웅.. 모든 것이 아득했다..
응급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내 잠잠해진다.
내가 정신을 잃은 것이다. 저혈압 쇼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