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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정 Jul 25. 2024

여보, 나 암 이래.

'암입니다."

따스했지만 단호한 말투와 눈빛..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크게 놀라지 않은 건 아마 예상 가능했던 시나리오 여서였을까?


2021년 4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2주 전, 미뤄뒀던 공단 암검사를 받기 위해 집 근처 '원자력병원'으로 향했다. 검사 후 친절한 간호사선생님의 말씀. "결과는 다음 주에 전화로 안내해 드릴게요. 수납하고 가시면 됩니다."

결과를 전해주신다는 전화는 다음 주 수요일 예정인데 금요일 오전 낯선 번호로 전화벨이 울렸다. "결과는 병원에 오셔서 들으셔야겠어요." 친절하지만 뭔가 숨기는 말투. 반드시 보호자를 동반할 것!!이라는 단호한 추가사항.. 그런 탓에 나는 병원에 가는 날까지의 며칠을 내 삶의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하며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 몸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구나.. 나 어디 아픈가 본데...?


특별히 어디가 불편해서 받은 검사는 아니었다.

짝수해마다 한 번씩 나라에서 내 건강을 지켜주기 위해 보내주는 종이에 쓰여있는 기한의 압박으로 서둘러하게 된 검사였다. 코로나로 잔뜩 예민해져 있던 시기였던지라 병원 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던 그때, 나라에서도 외출이나 모임 자체를 지양하라고 압박하던 시절인 그때, 올해는 그냥 넘어갈까? 싶었는데 친절(?)하게도 검사 기간을 6개월 연장시켜 준 덕에 그렇다면 받아야겠다.. 해서 받게 된 검사였다.

(당시의 나는 외출은 커녕 엄마를 보러 가는 것도 참고 또 참으며 출퇴근 이외의 외출은 거의 안했다. 모두들 과하다, 심하다 할 정도로 유별나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병원 주차장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 남편을 두고 나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나 먼저 가 있을게. 진료 시간 다 됐어."

잠시 후..

"보호자는 어디계세요?"

"주차하고 올 거에요."

"같이 들으셔야 하는데.."

"금방 올거에요. 저 괜찮아요 선생님. 말씀해주세요. 마음의 준비 하고 왔어요 저~(웃음)."

"음.. 암이에요. 근데 다행히 아주 초기에 발견했어요. 검사하러 잘 왔어요. 얼른 수술해서 똑 떼어버립시다."

온 김에 수술 날짜까지 잡고, 바로 가능한 수술전 검사까지 받고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네" 하고 밖으로 나온 순간, 남편이 나를 발견하고 몸을 돌려 달려왔다.

"벌써 끝났어? 뭐라셔??"

"여보, 나 암 이래..(웃음)"

..........

놀란 남편의 등을 토탁이며 말했다.

"괜찮아, 다행히 진짜 초기래. 수술해서 얼른 떼어버리면 된다고 하셨어. (옆에 계신 간호사 선생님께) 그렇죠 선생님~~~"


병원에 남아 이런저런 검사를 하며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재잘거렸다.

믿어지지가 않아서였을까.. 아님, 너무 믿어져서였을까..?

지금의 이런 모습도 지난 며칠 내 상상 속에서 본 적이 있다. 보호자를 동반해서 들어야하는 검사 결과가 감기이거나, 위염 따위일리가 없으니까..

근데 그런 일이 진짜로 생기면 어떡하지? 만약.. 혹시라도 암이면....???

처음 몇번은 고개를 저으며 그럴 리가.. 했지만 지난 십여년 동안의 나를, 내 몸 상태를 되돌아보면 아예 말도 안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어학원 강사에서 원장으로 15년 넘게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좋았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나는 내 일이 천직이라 여겼다.

처음에는 초짜 강사인 게 티가 날까 긴장해서 끼니를 거르며 수업 준비를 할 때가 많았다. 일이 조금 익숙해진 뒤에는 중간에 뭘 먹으면 몸이 무거워져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일부러 먹지 않았고, 혹 너무 기운이 없다 싶을때는 재빨리 해결할 수 있는 편의점 음식으로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년을 지내다 보니 나는 출근 전 늦은 아침 10~11시에 한끼. 퇴근 후 늦은 밤 11~12시에 한끼라는 불규칙한 식이패턴에 익숙해졌고, 당연히(?) 위염과 장염을 달고 살았지만 현대인이라면 응당 겪어야하는 고질병이라 여기며 가볍게 치부했다.


몸에서 처음 신호를 보내온 건 5년 전이었다.
가끔씩 새벽에 찾아오는 기분 나쁜 복통에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아 검사를 해보니 담낭이 다 돌로 변해서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을 받아 담낭 제거 수술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이때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담낭을 떼어내니 소화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내 친구들.. 위염과 장염이 사라져 오히려 밥 먹기가 편했다.(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병원에 가야 했으니까 통증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고 또 신이 났다.) 비록

'알쓰'로 변질돼 술은 못 마시게 됐지만 우리의 인생사가 그렇듯,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한 번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무시한 채(아니 잊고 살았겠지?) 이제는 내가 직접 운영해 볼 때가 된 게 아닌가 싶어 집 근처에 작은 학원을 차렸다. 분명 편하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신경 쓸 일이 몇 배는 늘어났고 그렇게 또 5년이 흐른 후에 '암'이 나를 찾아왔다.
'도대체가 너는 안 되겠다..'라는 말을 건네듯이..

담담하고 차분하게 수술을 준비했다.
아이들과 학부모님들께는 건강검진 중에 몸에 작은 혹을 찾아냈는데 찾은 김에 간단한 수술을 하게 됐다고 가볍게 둘러댔다.
남편을 제외한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우리 엄마.. 그 시간을 못 견디시리라.. 내가 암이고 수술을 해야 하고.. 며칠이면 될 시간이지만 엄마의 시간은 내 병을 안 그 순간부터 괴로우리만큼 더디게 흘러갈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 끝난 후에.. 다 지나간 후에 얘기하기로 한다. 전화만 제 때, 힘 있는 목소리로 하면 들키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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