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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정 Aug 01. 2024

엄마는 모르게.


아무리 걱정해도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혼자, 혹은 누군가와 골머리를 싸매고 끙끙 대며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봐도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고,

혹시나.. 만약에.. 라며 때론 즐겁고, 설레며 혹은

두려움에 휩싸여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애타게 기다려(?) 봐도 내게 일어날 일이 아니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뭐가 그렇게 괜찮아? 왜 다 괜찮아!!"

언젠가 남편이 내게 한 말..
"짜증 낸다고 달라질 일도 아니잖아, 어차피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떡하겠어. 잘 수습하는 수밖에."

여기서 잠깐,
그렇다고 내가 엄청 성격이 좋다거나 매사에 초 긍정적이라거나 밝고 맑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나는 그저 후회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인생이란 게 후회해 봤자 소용없고 세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후회하면서, 자책하면서, 미워하면서, 원망하면서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괜찮아, 어쩔 수 없었잖아.. 하며 툭툭 털어내고 빨리

일어서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이다.

암 선고(?)를 받고.. 학원으로 향했다. 암은 암이고 일은 또 일이니까..
남편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울고 원망하며 우울해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는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게 연신 괜찮냐 물었다. 나는 "완전~~~ 걱정 마."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건 거짓말일 테고.. 그렇다고 어떡하지? 내가 암이라니.. 왜 하필 나야.. 세상 무너질 일도 아니었다.
내 상상 속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니었기에.. 아니, 오히려 수술만 하면 항암치료 없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하셨기에 나는 정말 꽤나 괜찮았다. 빨리 수술받고 잘 회복하면 되지 뭐~~

학원에 와서 휴원공지 안내 문자를 보내고 갑작스러운 문자에 놀라 걱정스레 전화를 주신 몇 분과 심각한 일 아니라고 가볍게 통화를 한 뒤.. 아이들을 맞이했다.
"얘들아 쌤이 병원에 가야 돼서 이번주 수목금 학원 안 와도 돼~ 수업 없어~~"
"쌤 코로나예요?"(이 당시는 코로나 환자들의 동선까지 공개했던, 동선에 학원 옆 편의점이 공개되면 편의점 문을 닫고, 놀이터가 공개되면 놀이터를 폐쇄했던 말도 안 되던 시기 었다.)
"야!!! 쌤 코로난데 이러고 있겠냐?"
"쌤 어디 아파요?"
"암이에요?"
"야!! 암 걸리면 죽어."
걱정 어린,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아냐 아냐~~ 코로나도 아니고 암도 아냐~~ 그리고 암 걸린다고 안 죽어!!(강조) 그냥 몸에 작은 혹이 있는데 찾아 낸김에 걔들 떼어내는 간단한 수술받는 거야~~ 나중에 보강할 거니까 이번주는 신나게 놀아~~ 마스크 잘 쓰고!!!"

2박 3일, 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간호간병통합병동에 입원할 예정이었기에 보호자가 상주하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다. 자주자주 들여다보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연락 주신다고 간호사 선생님께서 남편을 안심시켜 주셨다.(실제로 너무 친절하게 세심하게 살펴주셨다.) 작은 보호자 침대에서 쭈그리고 잘 남편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코로나 시국이라 입원도 까다롭게 진행됐다. 먼저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음성이 나와야 입원 가능했다. 일반병동 입원 시 보호자나 간병인이 상주할 경우 반드시 음성 결과지를 제출해야 했으며 음성을 받은 보호자 1인 이외에는 입원실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2인실에 입원했다, 입원 환자가 많지 않던 시기라 나 혼자 온전히 2인실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들의 친절한 설명도 계속됐다. 드디어 병원 자유이용권이 내 팔에 채워지고(이름. 나이. 병실이 나란히 적혀 있는 팔찌를 나는 병원 자유이용권이라 불렀다. 그 팔찌를 차면 병원 어디든 편하게 드나들 수 있으니까^^) 주렁주렁 링거가 매달린다. 나는 수술을 앞둔 환자이기 때문에 두꺼운 바늘이 왼쪽 손목을 관통했다. 아... 이제 시작이다..
약이 잘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체온과 혈압을 잰 뒤 간호사 선생님이 나가시는 걸 확인 후 나는 전화를 꺼냈다.
지금 빨리, 짧게 엄마와 통화를 해야 한다...!!!

"엄마~~ 뭐 해~~?"
"이제 아침 먹었어 벌써 출근해?"(나는 매일 하루에 두 번,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엄마와 통화를 한다.)
"응, 시험 기간이라 할 게 좀 많아서 밥만 먹고 일찍 나왔어."
"중간에 먹을 거 좀 챙겨서 나오지."
"바나나 하나 챙겼어. 이따 우유 하나 사서 같이 먹을라고~~"
일상적인 대화를 마치고 학원에 잘 도착했다며 전화를 끊었다. 오케이 잘했어~~ 아주 완벽했어!!!




나한테 엄마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소중한 사람..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남편은 엄마를 이긴 적이 없다. 나의 1순위는 언제나 우리 엄마다. 사랑하는 엄마...
엄마는..
지금 내 나이, 그러니까 마흔셋에 남편을 잃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쁘게 핀 벚꽃이 추적추적 야속한 봄비에 떨어지고 말던 어느 봄날의 토요일.. 이른 오후 약속이 있다며 외출했던 아빠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쓰러져 그대로 나의 곁을, 우리의 곁을 떠났다. 영영...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은 모두를 절망하게 했지만 누구도 엄마만큼은 아니었으리라.
아빠는 가장 예쁜 딸기를 골라 엄마에게 주던 남편이자 언제나 두 딸보다 아내가 먼저였던 남편.. 어딜 가든 엄마손을 꼭 잡아 아빠 주머니에 쏙 넣어주던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사라졌다.
아빠를 보내고 엄마는.. 한동안 그 무엇도 씹어 삼키지 못했다. 정말 죽지 않을 정도의 막걸리만 조금씩 나눠 마셨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의 엄마는 점점 야위어갔고 나와 언니는 이러다 엄마마저 아빠의 곁으로 가버릴까 불안해했다.
하지만 엄마는 강한 사람이었다. 아빠가 남긴 두 딸이 있었기에 살아야 했고 버텨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리고 재수할 때까지도 엄마의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엄마는 늘 깨어있었다. 아침이면 신문 사설을 오려 넣어준 파일이 따뜻한 밥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학교 급식이 맛없다는 철부지 딸의 도시락을 하루 두 개씩 꼬박꼬박 챙겨줬다. 공부를 잘하지도, 그렇다고 열심히도 안 하면서 예민하기만 해서 툴툴거리는 못난 딸이 행여 뭐라도 필요하다고 할까 싶어 내가 잠들 때까지 성경책과 신문을 읽어가며 내내 내 곁을 지켰다.
항상 내 의견을 존중해 줬고, 나를 기다려줬다. 그럴 수 있다며 따뜻한 위로를 건넸고, 한 번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강압적으로 우리를 대한적이 없다. 잘 사는 친구들에 기죽을까 염려했고, 미안해했으며 좀 더 여유로운 엄마가 아닌 것에 마음 아파했다. 엄마의 끝없는 헌신과 믿음으로 언니와 나는 자기 몫을 해내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엄마는 정말 치열하게, 온 힘을 다해 살아냈다.
남편을 보내고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엄마는 여전히 아빠를 보낸 날, 아빠 생일, 설날, 추석 등 시끌벅적 가족들 모두가 모여 축하하고 즐거워했던 그날들이 다가오면 아파한다. 무의식적으로 엄마 몸이 그렇게 아빠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내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엄마 마음은 지옥일 거다. 꼼짝 않고 내 옆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테고 퇴원 후에도 내 몸조리를 해준다며 계속 음식을 만들겠지. 내 컨디션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내 몸짓, 목소리, 표정 하나하나에 혼자 안심했다가 아파했다가.. 나보다 더 아파하며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몰래몰래 울겠지.. 속상해서 울테고, 안심돼서 울테고, 감사 기도를 하며 또 울고 있을 우리 엄마..
혹 수술이 잘못될 수도 있고.. 만의 하나 생각했던 것보다 안 좋은 상황이 올 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엄마를 더 빨리 지옥으로 보낼 수는 없다는 게 내 결론.

다음 날 아침 8시..
차가운 수술대에 눕는다. 엄마는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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