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코 단 한 번도 암 판정에 불행하다 생각한 적 없다. 생각해 보니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애쓴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끼니란 그저 일 하기 위한 연료 같은 것.
맛있는 걸 먹는다는 건 당연히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또 맛없는 걸 먹는다고 화가 난다거나 속상하다거나 그러진 않으니까.. 그저 때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가끔은 귀찮았고, 그래서 소홀했다. 운동? 안 좋은 자세로 오랜 시간 일하다 보니 생긴 디스크와 통증으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주 1회 필라테스가 전부였다.
이렇게 나는 건강과는 거리가 먼 생활 패턴으로 꽤 오랜 시간 살았다. 한 번도 건강을 위해 뭔가를 챙겨 먹는다거나, 움직인다거나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아플 만도, 그럴 수도 있다고,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코로나를 달랐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정말 신경 썼기 때문이다. 외식도 한 적이 없고, 양가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도 자제했다.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소독과 방역에 미친 듯이(?) 신경 썼으며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거리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그런 내가 코로나에 걸리다니..
대체 어디에서? 언제??
아파도 열이 나는 편은 아니었기에 갑작스러운 고열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여지없는 보건소의 전화..
수업한 아이들의 전화번호를 담당 직원에게 다 넘기고 나서 떨리는 손으로 한 명 한 명 아이들과 학부모님께 전화를 돌렸다. 학원 방학이 시작되고 이틀째 되는 이른 아침이었다.
통화를 하면서도, 끊고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몰려오는 죄책감과 미안함, 모두에게 폐를 끼쳤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더 조심하자고 시작했던 소수 정예 수업 방식이 내 발목을 잡았다. 모든 아이들이 나와 밀접 접촉자로 격리 대상이 된 것이다.
내가 아이들의 여름방학을 망쳤어..
내가 아이들의 휴가를 망쳐버렸어..
괜찮다고.. 언젠가 한 번은 받을 검사, 이렇게 받아본다고.. 혹시나 만약에 아이들이 걸렸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심각한 후유증 없이 지나간다고 하니 괜찮을 거라고.. 그러니 아이들 걱정 그만하고 선생님 건강 잘 챙기시라고.. 모두들 위로의 말을 건네주셨지만 실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
모든 상황이 원망스럽고 억울하기만 했다.
당시는 코로나가 점점 심해지던 한여름이었다.
하루종일 보도되는 확진자 수와 사망자의 수를 보며 남의 일처럼, 큰일이다.. 어떡하냐..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이렇게나 방역에 신경 쓰는데 나는 안 걸릴 거야!!'
오만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 날 아침, 집 앞에 대기하고 있던 119 구급차를 타고 격리시설로 향했다. 파티션으로 겨우 구분 지어 놓은 원룸에서 생전 처음 본 사람과 열흘을 함께 지내야 한다.
격리 시설에 도착했을 때쯤 전날 검사를 받은 아이들의 결과가 하나 둘 도착했다.
-쌤~~ 저 음성이에요 걱정 마세요!!
-선생님, 저와 00이 모두 음성입니다. 아픈데도 없고 컨디션도 좋아요. 걱정 마시고 잘 회복하고 돌아오세요~~
-거 봐요 음성이잖아요~ 이제 그만 울고 빨리 나아요~
-어차피 더워서 밖에서 안 놀라고 했었어요. 집에서 시원하게 에어컨 켜고 놀 거니까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푹 쉬다 나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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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나 빼고 모두 음성이었다. 안도감과 미안함에 또 터진 눈물..
꼬박 이틀을 종일 울었다.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눈이 퉁퉁 붓고 코끝이 헐어 상처가 날 만큼.. 어디가 잘못된 건가 싶을 만큼 많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제서야 인지하기 시작한건지도 모르지만.. 열은 떨어지지 않았고, 한번 터진 기침은 누워도, 앉아도 멈추지 않았다.
격리시설에서 하루를 꼬박 앓고 다음날이 되자 기침도 열도 조금 잠잠해짐이 느껴졌다. 이제 괜찮아진 거 같은데? 여기서 뭐 하지?? 아직 9일이나 남았다.
가져간 다이어리에 그날의 증상과 먹은 것, 컨디션 등을 끄적이며 나도 모르게 쓰고 있던 말..
잘 이겨내자!!
잘 이겨내서 건강하게 내 자리로 돌아가자!!!
어차피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혼자 이겨내야 하는 일이기에 나는 기운을 내보기로 했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나더라도 맛있지는 않았을 편의점) 도시락을 참 열심히도 먹었다. 사람마다 증상이 다른지 나와 한 방을 쓰셨던 분은 미각을 잃지는 않으셨는데 그분이 국은 좀 짜다 하시면 짜요? 묻기도 하고, 과일을 먹고 인상을 찌푸리시면, 시구나.. 하면서도
찡긋 한번 하지 않고 맛있게(?) 도시락을 비워냈다.
옆에 분은 입맛이 없다며 거의 다 버리시고 주무시기만 하셨는데 나는 중간에 나오는 간식과 과일까지 모든 그릇에 담긴 음식을 조금씩이라도 다 챙겨 먹으며 그곳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덕분에 침대에 가만히 누워 도쿄 올림픽의 거의 모든 종목을 응원할 수 있었다^^)
새소리만 가득했던 그곳에서의 열흘은 오늘을 살고 있는 내게 또 다른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 날이 있었다..’
코로나는..
나를 무너지게 했고, 절망 속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절망뿐일 것 같은 그곳에서도 나를 꿈꾸게 했다.
마흔,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
나의 마흔은.. 그 해 늦은 봄부터 한여름까지 석 달 동안 휘몰아친 바람에 정신 차릴 틈이 없었다. 그저 휘청거릴 수 밖에..
갑작스런 암 판정에 두 번의 응급실, 격리시설에 갇히게 한 코로나까지..
어제보다 더 불행해졌다고 슬퍼한 적이 있다.
시간이 빨리빨리 가버렸음 좋겠다고.. 자고 일어났을 때 마흔 한살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울며 잠든 날도 있다.
나는, 마흔의 사계절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오직 저 세 사건으로만 기억할 뿐 추억은 없다.
봄에 핀 벚꽃나무가 어땠는지.. 여름에 뭘 했는지..
가을이 얼마나 멋졌는지.. 그해 겨울, 눈은 얼마나 왔는지..
이제와 생각해 보니 나에게 참.. 미안한 일이다.
그렇게 마흔의 두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미지/인사이드 아웃 (슬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