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 헐뜯는 가족

by 뚜벅뚜벅

어떻게 눈을 떴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는 집 앞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그런 엄마를 향해 핏대를 빡빡 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분명히 보였다. 동네 사람들 앞에서 속옷만 입고도 수건을 휘두르며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이 당당했다.

“알았나. 알아들었나”

“니 똑바로 해라. 까불락거리지 말고.”

어찌 된 영문인지 엄마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그런 엄마에게 아버지는 수건을 휘둘렀다. 엄마가 빌수록 아버지의 목소리는 커졌다. 다섯 살이었던 나는 무서워서 숨고 싶었다. 한밤중의 사건은 그러고도 마무리될 수 없었다. 엄마는 내 방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는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깨어있을 땐 울었고, 울다 지치면 눈을 감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외삼촌이 왔고, 엄마는 안방으로 옮겨갔다.

아버지에게 풀지 못한 화는 나에게 집중되었다. 엄마의 짜증은 깊어졌고, 그런 엄마는 머리가 자주 아프다 했지만, 우리 집 상황이 다른 집 보다 특별히 나쁘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그 시절엔 많이 맞고 빌고 지내는 시기였으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일이 잘 풀리는 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집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는 아버지에게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상한 밥을 버릴 때나 값비싼 옷이나 화장품을 숨길 때 엄마는 나에게 아버지가 오는지 망보게 했다. “느그 아버지 알면 큰일 난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엄마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한 미안함에 무조건 엄마 편을 들어야 했고, 아버지를 미워해야만 했다.

다음은 동생이 엄마를 힘들게 했다. 우리 집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장손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엄마는 애가 탔다. 다섯 살부터 초등학교 2학년이 되도록 이불에 오줌을 싸는 것으로 시작했다. 집안의 이불이란 이불은 다 꺼내서 한 겨울에도 매일 빨았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아 엄마는 노심초사였다. 아버지의 일이 잘 풀리는 것이 오히려 동생을 힘들게 했다. 이렇게 저렇게 다 해줘도 안되니, 동생은 점점 더 부족한 아이로 낙인찍혔다. 엄마는 아버지가 알까 봐 자꾸 둘러대는 눈치였고, 나만 보면 동생의 흉을 봤다.

“뭐가 부족해서 저러는지 모르겠다.”

“니랑 동생이랑 바뀌어 태어났어야 했는데.”

“외탁해서 잘 생겼다 했는데, 커가면서 큰집 식구들이랑 똑같아. 애는 갔다 버리고 껍데기만 키웠네. 어휴"

귀여운 막내가 태어났다. 막내는 무얼 해도 사랑스러웠다. 막냇동생과 큰 동생은 서로 대조된 평가를 받았다. 엄마는 막내만 이뻐했다. 덩달아 나도 막내를 이뻐했다. 엄마를 힘들게 하는 큰 동생이 나에게도 이뻐 보일 리가 없었다. 큰 동생의 편은 없었다. 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부터 자주 가출했다.

더위로 지친 한가위 무렵에 사촌 조카가 서울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아버지는 당신을 모시고 우리 가족 모두가 참석해야 한다고 채근했다. 사촌 조카가 아버지 없이 결혼한다고 하니, 더 애틋한 눈치였다. 하지만 내 형제자매도 아닌데 앞장서서 챙기라는 아버지의 재촉에 나는 그런 마음이 남아 있으면, 밖으로 떠도는 큰 동생이나 챙기라고. 한 번도 하지 못한 말을 했다. 갑작스러운 반항에 화가 난 아버지는 새벽까지 전화로 퍼부었지만, 나는 지지 않았다. 부모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한다고. 지금을 놓치면, 동생은 영영 남남이 될 것이라고. 아버지는 사촌 언니 오빠들한테만 다정했지, 자식들에게 다정한 말 한 번 한 적이 있냐는 내 말을 듣지 못하는 아버지는 당신 말만 했다.

“어디 고등학교 간 줄 아나? **종고 갔다. 지가 공부 못해서 변두리 고등학교밖에 못 갔지. 부모는 뒷바라지 다 해줬다. 지가 못했지.”

잊고 있었다. 이쯤 되면 선을 넘은 거다. 큰 동생은 뭐든지 못하고 안 하는 문제아였다. 아무리 챙겨줘도 나아지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서 큰 동생과 연결되면 다른 가족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나와 싸우면 큰 동생이 누나에게 대던 것이고, 막냇동생과 싸우면 막냇동생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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