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을 때 오는 전화는 받기가 어렵다. 함께 먹을 가족이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꾹꾹 눌러 담아놓았던 묵은 감정의 쓰레기통이 한꺼번에 열렸던 그 순간도 그랬다. 당신이 듣고 싶은 대답을 듣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아버지의 전화로 시작되었다. 그때 나에게 필요한 배려는 거리 두기였다.
“어, 내다. 밥묵었나?”
“지금 먹어야 해요.”
“니 팔월에 시간 좀 내야 한다. 신 서방은 회사 가야 하니까, 니가 시간 좀 내라. 높으신 분들도 오니까, 니가 시간 좀 내라.”
“저도 바빠요. 그리고 제가 그 높으신 분들을 만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퉁명스럽게 끊었다. 아버지의 전화를 그렇게 끊은 것은 처음이었다. 지켜보던 남편도 놀라며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묻는다. 이 전화부터 아버지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싸웠다. 그동안 아버지에게는 당신의 이야기를 중간에 끊지 않고 들어주는 자식이 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불쌍했다. 내 감정 보다 아버지의 감정을 이해하려던 내 노력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아들 노릇을 원했다. 그것은 내가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크게 싸우기 전에 전조증상은 있었다. 얼굴 보며 이야기하고 싶다고 내려오라는 채근에 바쁜 시간을 쪼개 어렵게 내려갔다. 함께 식당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당신 마음을 알아주는 자식이 하나도 없다고 짜증을 폭발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같이 온 남편과 딸에게 정말 미안했다. 한 차에 다섯 명이 붙어 앉은 채 짜증을 고스란히 들어야 하는 20분은 충분히 당황스럽고 괴로웠으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순간부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그때 멈추고 내 감정을 표현했어야 했다. 나는 그렇게 못 했다.
화를 드러내도 안전하거나 인정받을 수 있다고 느낄 때가 아니면 대부분 참는다. 드러내지 않을 때가 드러냈을 때보다 뒤탈이 없다. 미안할 일도 없고, 뒷수습할 일도 없으니까. 내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거나 피할 수 없을 때만 화를 낸다. 그 외에는 피해버리는 것이 더 편하다. 친정 식구는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아니다. 친정에 손 벌리지 않고 혼자 감당하려고 노력했으니까. 그래도 미안함은 남기지 않기 위해, 후회하지 않을 만큼 애썼다. 이런 내 마음은 자꾸 기대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긋났다.
대답하지 않고 듣고만 있어도 말하는 사람은 자기 말을 인정하고 있다고 느낀다. 동의하지 않거나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침묵하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만큼 외로운 것이다. 외로움은 뿌리가 깊다. 사람은 사람이 필요하다. 이야기도 나눠야 하고, 공감도 필요하다. 이것은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아버지는 외로움을 가족들에게서 얻는 분은 아니었다. 무관심하고 무뚝뚝하던 분이 나이가 들어가니 가족만 남은 것이다. 그 가족이 다 외면하고 있다. 불쌍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대신 살 수도, 대신 짐 질 수도 없으니까.
아버지의 전화가 불편하다. 그렇게 화를 내고 싸운 뒤로는 아버지의 전화를 피하기만 했다. 그러나 저번 주부터는 전화는 받는다. 내 마음을 더 드러내지 않게 질문은 하지 않고, 간단한 대답만 했다. 이것만으로도 전화를 받지 않아 생기는 미안함은 벗어났다. 그러나 전화를 받았으니, 아버지는 또 부탁하거나 짜증을 낼 것이다. 그때가 벌써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