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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대로 Aug 14. 2024

세 번째 - 거짓 동화 짓기를 멈추며


  

  구겨져 자는 것도 힘들고, 가족 식사를 챙기는 것도 버거웠다. 눈에 보이는 찌든 때와 먼지를 청소하고 먹기 위해 그릇을 찾아 설거지하는 것도 지쳐갈 때, 한 끼만 먹고 올라오는 정도로만 친정에 갔다. 식당에서 아버지 말씀에 대충 맞장구만 치다가 올라왔다. 왕복 8시간의 운전 거리를 생각하면 남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만남이었다. 그렇게라도 이어졌던 만남이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하면서 크게 싸웠고 전화로는 죄송하다 했지만, 걱정하며 안타깝게 여겼던 내 마음은 사라졌다. 그렇게라도 가야만 마음이 편했던 이유는 무엇이고, 그 마음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인 내가 아들인 동생들에게 뒤처지는 것이 싫었다. 아들의 소풍 김밥은 소고기 김밥이고, 내 김밥은 햄도 없는 김밥이었다. 그딴 걸 기억하는 나도 참 지질하지만, 어릴 때는 억울했다. 엄마의 관심은 어쩔 수 없이 아들을 향해도, 아버지만은 나를 더 인정했고 챙겼다고 믿고 싶었다. 이것이 확증편향인가? 자기가 믿고 싶은 결론과 맞아떨어지는 사건이나 행동만 기억하려 하고, 아닌 증거는 무시해 버리는 태도 말이다. 나도 부모 관심을 받았다는 기억이 필요했다. 아빠 사랑은 딸이라는 말처럼 그래도 아버지는 날 챙겨줬다고 믿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눕히면 눈 감고 일어서면 눈 뜨는 인형을 사 왔고, 시험공부하다가 불 켜놓고 졸고 있으니 전기세 아깝다고 구박하는 엄마 앞에서 내 편을 시원하게 들어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눈 마주치며 걱정해 줬었다고. 이런 마음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면 애틋하고 훈훈했다. 아버진 아버지 대로 대답 없는 큰아들과 처가 식구만 챙기는 막내아들에게서 느끼는 섭섭함을 해소할 수 있은 기회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더 나에게 기댔고, 그 기대를 내가 거부하며 거짓 동화는 깨졌다.

 

  초등학교에서 챙겨 오라는 준비물을 꼬박꼬박 챙겨달라며, 무관심한 아들들과 달리 난 엄마를 귀찮게 했다. 고집부리는 딸이 좋게 보일 리 없다. “ 하라는 녀석은 안 하고, 안 해도 되는 애만 자꾸 하려 하네.” 욕심이 많아 동생은 챙기지 않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구박받을 때마다 듣던 말이다.

  중학교 입학부터 시작된 교복자율화로, 입고 오는 상표로 내 등급도 매겨졌다. 나도 그런 옷 좀 사 달라 떼쓰자, 단칼에 집에서 쫓겨났다. 집 앞 골목에서 아버지만 기다렸고 따라 들어가야만 저녁밥상에 낄 수 있었다. 집안일에 무관심한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고, 엄마는 “니도 커서, 꼭, 니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 그땐 내 맘 알 거다. “라는 말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걸 느끼게 하려 했다. 이 말은 내가 잘못했을 때마다 자주 들었고, 난 행복한 결혼은 불가능하며 자식은 절대 낳지 말자 다짐했었다.

  물론 엄마도 억울했을 것이다. 장남 장남하며 잘 되기를 기대하는 아들은 그 기대에서 자꾸 엇나가고, 그때마다 듣는 말은 집에서 자식 교육 하나 제대로 못 시키냐는 핀잔이었을 것이다. 사촌과 비교하며 시댁의 눈치도 받았을 것이다. 퉁명스러운 아버지는 예민한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으니까. 그것을 큰딸인 나라도 친구처럼 알아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딸은 착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악착을 떨었으니까 미웠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에겐 독한 말로 얼어붙게 하는 엄마가 있었고, 집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하여 tv만 보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런 집은 흔하다. 그러나 나는 이 흔한 사실을 바꾸고 싶었고, 그래서 길을 잃었다. 만남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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