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에 도시락도 먹고 여유 있게 산을 내려올 때, 엄마 전화를 받았다. 뭐 하고 있냐고 묻지도 않고 당신 말만 하신다. 친정 식구들의 전화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언제나 뭘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먼저 거의 하지 않는다. 부탁하거나 징징거리는 전화는 아버지나 막내가 했다. 큰 동생과 엄마는 나에게 거의 전화를 하지 않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불편하다.
“어, 내다. 주말이니까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네”
“막내가 새로 이사한 아파트 갔다 왔다. 진짜 좋더라. 니는 안 가봤제?”
“네”
“혁신지구 안에서 젤 좋은 곳으로 위치도 좋고, 평수도 넓은 이름난 아파트다. 초등학교도 바로 걸어갈 수 있고, 막내며느리가 아파트값이 또 올랐다고 자랑하더라. 어찌 그리 좋고 비싼 아파트를 구했는지. 설계도 잘 빠졌더라. 요즘은 아파트가 진짜 좋더라. 멋지더라.”
“아. 네. 엄만 아들 잘 뒀네요.”
“다 지가 잘 한 거지. 뭐 내가 해준 게 있나? 빚도 엄청 냈을 것인데, 걱정이다. 부모가 있으면 뭐하노. 자식한테 도움이 안 되네. 막내 지가 산다고 쌔가 빠지지. 불쌍해 죽겠다. 이래 살아서 뭐하노. 아니 난 그냥 콱 죽고 싶다. 밥만 먹는 니 아빠도 보기 싫고.”
“막내가 알아서 잘할 거예요. 아파트는 융자가 있어야 거래가 더 잘 된다잖아요.”
엄마는 아들 자랑할 곳과 넋두리할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가 여형제가 있나? 만만한 친정이 있나? 답답해서 전화했다. 가까이 있으면 니한테라도 갈 텐데, 당최 너무 멀어서. 그래, 신 서방은 별일 없제? 그래 니도 잘 지내라. 전화 끊는다.”
전화가 끊어지면 화가 난다. 엄마가 듣고 싶어 할 말만 습관처럼 했지만, 내가 하고픈 말은 못 했다. 억울하고 찜찜해 산길에 집중하지 못한다. 뒤처지는 내 걸음이 신경 쓰여 남편은 뒤돌아보며 자꾸 채근한다. 이런 순간엔 “왜 자꾸 나한테 뭐라 해? 내가 그렇게 만만해?”라며 화를 엉뚱한 곳에 낸다. 할 말을 참으면 사라지지 않고 부풀어 올라 방향을 잃고, 가장 가까운 대상이나 스스로를 공격한다. 억울한데 무엇 때문에 억울한지 모르겠다. 내 상처는 언제 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 채 자주 깊어지고 넓어졌다.
일요일 산행은 하산이 빨라도 여유가 없다. 해가 지고 집에 도착하면 월요일 출근 걱정이 더했다. 산짐을 정리한 후 씻고 나와 눈에 거슬리는 유난히 긴 머리카락을 치우며, 또 날이 선 말을 딸에게 뱉었다. “집에선 머리 좀 묶고 다니라고 했잖아. 네 머리카락은 엄마 아빠 머리카락의 세 배야. 네가 없을 땐 청소가 반으로 줄어. 알고 있어? 너는 다 쓰지도 않은 화장품을 또 샀어? 목욕탕 선반에 안 쓴 네 것이 몇 개냐?” 참다못한 남편이 내 손을 끌고 집 밖으로 나온다. “너에게 집중해. 괜히 가족 잡지 말고. 왜 그러는 거야? 너만 알고 있으니 잘 생각해 봐. 후회할 짓 하지 말고.”
할 말을 다 하며 사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나는 아직도 부모에게 할 말을 못 한다. “엄마, 막내 걱정의 반만이라도 저한테 해봤어요? 저는 막내가 사는 아파트 보다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저는 막내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나이인데도 이렇게 살아요. 그럼 전 비참한 거예요? 제 걱정을 막내에게도 말하나요? 언제나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했지만 항상 혼자였어요. 이젠 제 걱정도 좀 해주면 안 되나요?”라는 말은 입에서 맴돌다가 질투와 화로 변해 가족을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