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하 May 13. 2024

예술은 사기일까?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에케 호모화 훼손 사건'입니다. 오랜 세월에 바랜 스페인의 한 성당의 유물 벽화를 엉망으로 덧칠해 복원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반전이 있었죠. 그림 속 흉한 원숭이 얼굴 모양으로 복원된 성자를 보기 위해, 평년 보다 11배나 많은 관광객이 해당 벽화가 있는 성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 일을 저지른 화가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우연한 결과였죠. 작품훼손(반달리즘)이 우연성의 기법(추상표현주의)으로 변신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벽화를 보러 오는 관객이 많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에케 호모화>는 예술품으로써의 자격과 가치를 상실하고, 해당 작가는 그림을 손상시킨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작품으로써의 가치가 0에 가까웠던 엉망진창 복원벽화가, 전에 없던 입장료를 받을 만큼 인기 예술작품으로 변신해 버린 사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혹시, 예술의 순수성에 대한 배신감이 들지는 않았나요? 우리는 예술에 속은 걸까요?


예술가는 직관적 영감을 창작물에 불어넣고, 관객은 주관적 감성과 공감을 작품에 투영하여 느끼고 평가합니다. 작가의 영감과 관객의 감성 사이에 우연한 접점이 생길 때, 점 하나만 찍어도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미술사적인 학문과는 별개의 입니다. 게다가, 감상자 개인의 독특한 심미적 감성은 전문가 집단의 객관적 해설에 반할 확률이 높죠.


고전파 하이든은 "난 고전파답게 곡을 써야 해!" 다짐하고 작곡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고전파 작곡가인지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필연적으로 동시대 관객들도 고전파를 염두하고, 그의 음악을 감상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고전파 작곡가'라고 후손들에 의해 이름표를 달게 된 겁니다.


지금 자리, 내가 듣고 있는 하이든의 <천지창조>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경험입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고전파 연관 작품해설에 의존하는 순간, "어, 이거, 내가 맞나?" 하며 눈치를 보게 됩니다. 닫힌 감상되어버리. 이런 식의 예술 엘리트주의 혹은 맥락주의 비평사조는 오랜 세월에 걸쳐 대중을 주눅 들게 했습니다. 주관적 사고의 틀을 한없이 축소시켰습니다. 그러다, 훼손된 에케호모 작품에 열광하는 식의 반작용이 일어난 것입니다.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간, 감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심미적 감성과 감각이어야 합니다. 이외의 것들은 들러리입니다. 초등생 보다 못 그린 훼손 벽화도, 관객이 의미를 부여했으므로 귀한 작품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덧붙임 1. 그렇다 하여, 예술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가 의미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학문과 연구 없는 예술의 진보는 불가능합니다.

 

덧붙임 2. 상황인즉슨, 복원을 시도한 해당 화가의 실력이 부족해 못 그린 것이 아니고, 벽화 재질의 특성을 몰라서 어그러진 그림이라 합니다.

이전 12화 저 알아요, 왈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