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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수빈 Jun 02. 2024

지구 종말 vs. 사랑

우리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더 이상 노력할 이유가 없을 때 무엇 때문에 노력하는지가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사고로 광활한 우주에 혼자 남겨진 주인공이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필사적인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의 영화 <그래비티>를 두고 주연 배우 산드라 블록이 한 인터뷰다. 상황이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남은 희망을 걸고 한 걸음 내딛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막연하지만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로부터 비롯된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산드라 블록의 인터뷰가 다음 작품의 주제에 대한 큰 힌트를 던져 주었다.

  여러 모로 인류가 종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지금, 이보다 더 중요한 화두는 없어 보였다. 세상이 망해 가는 마당에 다른 문제가 어찌 중요할 수 있을까. 시나리오 소재를 고민하던 내게 ‘종말’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하고 유일한 이야기였다. 반드시, 바로 지금 세상에 공유해야만 하는 이야기. 그런 의무감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운석 충돌로 인한 종말이 예고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영어 과외 교사 ‘윤슬’은 자신이 가르치던 중학생 ‘재영’의 난데없는 자살 예고에 혼란에 빠진다. ‘어차피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며 삶을 거부하는 재영에게, 윤슬은 영어가 아니라 ‘삶의 이유’를 가르쳐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문제는 윤슬 역시 그 이유를 모른다는 거다. 그렇다고 이대로 재영이 죽음을 택하도록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딜레마에 놓인 윤슬은...

  나름대로 흥미로운 설정으로 이야기의 1막을 열어 젖혔지만, 그 이상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럴듯한 결말로 이야기를 매듭짓기 위해서는 윤슬이나 재영이 납득 가능한 삶의 이유를 찾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하더라도 두 사람이 그 과정에서 깨닫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 텐데, 아무리 오래 시나리오를 붙잡고 있어도 만족스러운 결말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작가인 나부터가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한 답을 내릴 수 없으니, 벽에 부딪히는 건 당연했다.

  막막했다. 소재도 좋고, 이야기도 욕심나는데, 정작 이를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시킬 퍼즐 조각 하나가 빠진 느낌이었다. ‘아, 좋은 시나리오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한 아쉬움을 삼킨 채 당분간 이야기를 묵혀 두기로 했다. 언젠가 번뜩 그 퍼즐 조각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시나리오를 준비하던 때는 내게 여러 모로 답답하고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였다. 6년 동안 다닌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고, 영화를 만들지 못한 공백기가 한없이 길어져 초조했다. 1년 반을 만난 연인과의 이별도 있었고, 시간이 흘러 짝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얼마 후 모종의 이유로 이를 단념하기도 했다.

  종말에 관한 시나리오를 쓸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 정말로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화두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헤어짐의 이유를 수없이 헤아려 보고, 그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들여다보고, 그러다 또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이고,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에 하늘을 날았다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그렇게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의 부침을 겪다 보니, 어쩌면 내가 진짜 써야 할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게 사랑 이야기인데, 내가 그 사랑의 바다에 물방울 하나 떨어뜨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에 한동안 시나리오를 쓰는 게 망설여졌다. 흔히 세상사 모든 문제의 해답을 얼렁뚱땅 ‘사랑’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것도 영 미덥지 않았고, 이미 ‘종말’을 화두로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내게 ‘사랑’이란 너무 흔하고 뻔한, 지극히 개인적이라 영화로 만들 가치가 없는 주제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종말’처럼 중요한 화두를 다룬다고 해서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이야기를 억지로 쓸 수 있을까? 반대로 ‘사랑’처럼 하찮은 화두라고 해서 요동치는 내 마음을 애써 무시할 수 있을까? 어느 새벽, 방구석에 앉아 라디오헤드의 ‘Creep’을 들으며 감성에 젖어 있던 나는 문득 이런 결론을 내렸다. ‘지금 내게는 사랑이 지구 종말이고 세상의 끝이구나.’


  나 같은 게 무슨 인류를 대표하는 영화감독도 아니고, 꼭 ‘종말’을 소재로 ‘삶의 이유’와 같은 거창한 통찰에 이르는 이야기를 써야 할 의무나 능력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종말에 관한 대의보다 사랑 따위의 사사로운 감정에 더 크게 흔들리는 인간. 나는 애초에 그런 존재에 불과했음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로부터 약 3주의 집필 기간을 거쳐 단편영화 <지구 종말 vs. 사랑>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야기 속엔 각각 ‘지구 종말’과 ‘사랑’을 주제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윤진’과 ‘해경’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두 사람의 갈등을 통해 종말에 대한 고민도 담고 싶고, 사랑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빚어낸 이야기다. 언뜻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한 제목이지만, 실은 ‘사랑’에 비중을 더 크게 두고 있다. 뻔한 사랑 이야기를 내 식대로 변주하고 조합한 것에 불과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했다는 데 큰 만족감을 느낀다.


  ‘종말’부터 ‘사랑’까지 이야기 소재로 써먹고 나니, 다음엔 또 무슨 수로 영화를 만드나 싶은 생각이 든다. 다만 이번 작업을 통해 우주, 혹은 그 이상의 거대하고 중요한 화두를 다뤄야만 한다는 의무감은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아무리 중요한 화두를 다루더라도 작가 스스로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공허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관객들의 마음 또한 요지부동일 것이다. 어떤 소재를 다룬다 해도 진짜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 쓰리라. 설령 그것이 사랑보다 더 하찮은 것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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