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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예찬

여러분, 달려요.

by 전수빈

달리기를 시작한 지 벌써 10년은 되었지만, 원래부터 운동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어릴 때 태권도나 수영을 어머니의 권유로 인해 억지로 배웠던 내게 운동이라는 건 자발적으로 하기엔 몹시 부자연스러운 행위였고, 무엇보다 땀 흘리는 걸 너무나 싫어했기 때문에 기꺼이 공원을 달리며 육수를 뽑는 이들은 내게 순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던 내가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니라 20대 초반에 시작한 첫 연애였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잘 관리된 외형으로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면 꽤 낭만적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절박하고 한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의 여자친구는 무척이나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내가 곁에 있어 주기를 원했지만, 원체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내게 그의 요구는 너무나 부담스럽고 버거웠다. 게다가 신경질적이고 자기 비하 성향이 강해서, 특별한 일이 없어도 걸핏하면 내게 짜증을 내거나 끝없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행위에 맞장구를 쳐줘야만 했다. 그러다가 내가 지친 기색을 보이거나 이제 그만하라고 다그칠 때면 ‘남자친구로서 그런 것도 못 받아 주냐’는 식으로 나무라곤 했다. 완전히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까지는 그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던 데다, 그것이 첫 연애 경험이었던 내게 이것은 한 사람의 연인으로서 응당 감수해야만 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모든 연인들이 다 겪는 일인가 보다, 그런데 내가 좀 예민해서 유독 힘들게 느끼는가 보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나도 보살이 아니었던지라 그에게서 받은 스트레스가 점차 신체적인 반작용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체중이 줄고, 머리가 빠지고, 얼굴에 울긋불긋한 뾰루지가 생겨났다. 주변 사람들도 나의 변화를 즉각 알아채고 걱정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수시로 찾아오는 두통이었다. 언제부턴가 그와 작은 다툼이라도 생기면 그날 하루 종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시뿐일 줄로 알았던 두통이 몇 달 간 지속되고, 거울 속 내 모습이 전과 확연히 다르게 못나졌음을 깨달았다. 위험신호였다. 이대로 있으면 큰일난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무작정 밖으로 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해서 이 상황을 극복하겠다’ 같은 결의나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 폭발할 것 같은 답답함을 어찌할 수 없어 몸부림치는 거였다. 당연히 올바른 호흡법이나 자세 따위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30분쯤 달리고 나서 멈춰 보면, 어느새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했던 두통이 한결 잠잠해져 있는 걸 느꼈다. 한 번의 달리기로 모든 근심을 완전히 날려버릴 순 없어도, 적어도 다음 날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안정은 되찾아주었다.


지난한 연애가 끝난 후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 꼴로 지속한 달리기는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스트레스의 근원도 사라지고, 수면과 식습관 변화에 의식을 기울이자 망가졌던 몸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날이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무작정 뛰었다. 체온의 상승을 요만큼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한겨울에도 일단 뛰다 보면 금세 추위를 잊게 되었다. 숨만 쉬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날의 달리기는 말 그대로 땀을 비 오듯 흘릴 수 있어 좋았다. 아침에 뛰고 나면 그날 하루치 땀을 미리 다 쏟아버린 듯 개운했고, 저녁에 뛰고 나면 그날 하루를 남김없이 불태운 듯한 기분이었다. 땀으로 축축하게 달라붙은 옷이 불쾌할 법도 한데, 왜인지 기분은 상쾌했다. 일단 한번 비에 젖고 나면 더 이상 젖을 걱정 없이 신나게 빗속을 뛰어놀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달리기를 하는 동안에 특별한 쾌감이 찾아오는 건 아니다. 나는 무릎에 약간의 통증이 있어 하루에 달리는 시간이 30분 내외에 불과하기 때문에, 달리기 애호가들이 종종 겪는다는 ‘러너스 하이’를 체험한 적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나조차 지금껏 꾸준히 해 온 걸 보면, 달리기에는 분명한 중독성과 쾌감이 존재한다.


스마트폰을 한 손에 쥐고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의 볼륨으로 음악을 들으며 달리곤 한다. 플레이리스트는 그날 기분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주로 의욕을 증폭시켜 주는 메탈 음악을 들으며 무대에 선 락스타가 된 상상을 한다. 메탈 중에서도 맛깔나는 랩과 적재적소에 터지는 사운드의 뉴 메탈(Nu metal)이 제격이다. 콘, 핀치, 슬립낫, 린킨 파크, 림프 비즈킷 등 짧게나마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밴드들이 들려주는 쇳소리와 함께 달리면 발뒤꿈치에 로켓을 단 듯이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컴퓨터,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를 많이 사용한 날이면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나와 음악을 듣지 않고 달리곤 한다. 다소 심심하고 적적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음악 없이 달릴 때에는 자연히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거나 공상을 즐길 수 있다. 나는 종종 가상의 마라톤 대회에서 선두 주자들을 순식간에 재치고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상상을 하며 막판 스퍼트를 낸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승리감, 성취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살면서 어떤 일에서든 그렇듯이, 달리기를 할 때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군것질을 한 탓에 옆구리가 쿡쿡 찌르는 듯 아파 오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이 무거워 금방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미리 정해 둔 결승점을 바라보며 ‘저기까지만 도달한다면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라고 주문을 외운다. 그리고 정말 그 지점을 통과하고 나면 앞으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이 단지 그 순간뿐이라 해도.


일이 없는 날에는 무기력증에 빠지기가 쉬운데, 그날의 일부분을 달리기에 할애한다면 ‘그래도 오늘 뭔가 했구나’ 하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기분,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공허함과 싸우기 위한 도구 중 달리기만큼 간편하고 효과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하루하루를 작은 승리와 성취로 채워 가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다.


연초의 강추위 속에서도 달리기를 게을리하지 않다 보니 어느새 봄이 왔다. 따뜻해진 날씨에 슬슬 많은 사람들이 봄이 가져다주는 낭만을 반기는 눈치지만, 더위를 많이 타는 데다 계절성 알러지까지 있는 내게 봄은 그다지 친하지 않은 계절이다. 하지만 달릴 때마다 땀을 실컷 흘릴 수 있다는 건 좋다. 겨울보다 조금 더 천천히, 덜 치열하게 달려도 충분하다. 그러나 어쩐지 봄의 말랑말랑한 기운에 순순히 취하고 싶진 않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더 빡센(?) 곡들로 채워 나만의 메탈 잔치를 열 것이다. 마침 오후 내내 껴 있던 먹구름이 걷히고, 후드 티 하나만 걸쳐도 좋을 만큼 공기가 선선하다. 딱 달리기 좋은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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