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도 내 자리가 있을까?
하필이면 비번인 날 편의점에 불려 나와 억지로 근무하며 온갖 진상 손님들로부터 고초를 겪은 주인공 ‘단테’는 냉동고에 드러누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냐고, 왜 비번인 날 이곳에 갇혀 노예보다 못한 임금을 받으며 얼간이 같은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느냐고. 그런 단테에게 친구 ‘랜달’의 따끔한 일침이 날아든다.
“다 헛소리야. 네 진짜 문제가 뭔지 알아? 넌 우물에서 벗어나야 돼. 그냥 누워서 삶에 대한 비난만 하고, 네가 처한 상황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 하지. 이 일과 사람들, 비번 날 일하는 게 그렇게 싫다면 왜 그만두지 않지? 현실에 안주하고 있구나? 행여나 네 소중한 소우주가 부서질까 봐 겁을 내는 거야.”
부산에서 태어나 약 30년 간 부산에서 살아 온 나는 언제부턴가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 왔다. 어차피 영화 일을 계속하고, 내 그릇을 키우려면 좋든 싫든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 부모님 댁에 얹혀 있는 것도 더 이상 못할 짓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어려운 현실적인 이유와 득과 실을 따지다 보니 선뜻 행동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정말 늦은 게 아닐까’ 하고 걱정되는 시기까지 와버렸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단편영화 후반작업을 마무리하던 어느 날, 문득 케빈 스미스의 데뷔작 <점원들>을 다시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종일 불평불만만 쏟아내는 단테를 향한 랜달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등짝을 찰싹찰싹 때렸다. 만족하지 못하는 환경에 있으면서 왜 그걸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너는 왜 여태껏 편의점을 그만두지 못했느냐고.
그래서 곧장 서울행을 결심했다. 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던 것에 힘을 실어 보기로 한 것이다. 기존의 포트폴리오에 새로운 경력을 추가하고 디자인을 보기 좋게 다듬었고, 서울의 약 40개 영상 제작사에 차례로 지원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간간이 모 회사가 내 이력서를 열람했다는 메일만 날아올 뿐,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없었다. 내 나름의 인생 서사가 녹아든 흥미로운 이력서라고 생각했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내가 그다지 매력 있는 인적 자원으로 보이지 않는 듯했다.
살면서 이때만큼 내 나이를 의식했던 적이 또 있었나 싶다. 수상하다 싶을 정도로 면접 연락이 뜸하자, 먼저 그 문제점을 나이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벌써 취업 시장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나이가 되었단 말인가. 당시 만 31세였으니 그렇게 취업이 어렵기만 할 나이는 아니었을 텐데, 그때는 ‘이왕이면 나보다 어린 지원자를 더 선호하겠거니’ 생각하며 주눅이 많이 들었다.
그러던 중 두 군데 회사로부터 면접을 보지 않겠냐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월요일, 화요일 나란히 잡힌 면접 일정에 숙소를 잡고, 지인의 결혼식이 있어도 고집스럽게 사지 않았던 구두와 재킷까지 사 입고서 서울로 향했다. 매번 일이나 여행 목적으로 짧게 다녀올 때와 달리 ‘앞으로 내가 살 곳’이라는 마음으로 본 서울은 왠지 바다 건너 어느 타국에 이르렀을 때처럼 생경한 풍경이었다.
첫 번째로 면접을 본 곳은 역삼역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회사였다. 쉽지 않은 면접이 될 거라 예상하며 지난 한 주 동안 면접 관련 유튜브 영상을 참고해 질의응답을 준비했지만, 작은 회사라서 그런지 형식적인 매뉴얼에 따른 면접이 아니어서 편하게 임할 수 있었다. 이곳의 대표님은 내가 입사 지원 시 전달했던 이력서뿐만 아니라 내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했을 때 나오는 정보들까지 꼼꼼히 살펴보신 듯했다.
어째 말도 술술 나오고 면접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흘러가는 듯 보였는데, 면접이 정리될 때쯤 대표님께서 쿨하게 확답을 던져 주셨다. “일단 합격이고, 다른 회사들도 지원하셨을 테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숙소로 돌아가는 길, 헤실헤실 떠오르는 미소를 마스크 뒤에 감추고서 미세먼지로 물든 강남 한복판의 풍경을 무작정 사진 찍었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의 내 출근길 풍경이구만!’
지원한 데 비해 턱없이 적은 수의 회사에서 면접 제의가 온 탓에 자존감이 바닥을 기고 있었는데, 당일 배송으로 받아 든 합격 소식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역시 난 될 놈이야’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오후엔 두 번째 면접을 보러 삼성역으로 향했다. 이미 전날 한 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아 두었음에도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튜디오 공간에서 진행된 두 번째 면접 역시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동안 매서운 질문으로 다그치는 면접관을 상상하며 트레이닝을 해 온 나는 잠깐이지만 ‘면접이란 거 생각보다 별 거 아닌데?’라는 미친 생각마저 했던 것 같다.
무사히 면접이 끝나 갈 무렵, 그곳의 과장님께서 문득 과제를 하나 던져 주셨다. “5분 드릴 테니까, 호랑이를 주인공으로 기승전결이 확실한 시놉시스 한 편을 써주세요.” 패닉 상태에 빠진 나를 홀로 남겨두고, 과장님은 유유히 자리를 비우셨다.
‘아이 씨, 뭐 쓰지...’ 곧바로 노트를 펼치고 펜을 굴렸지만 약 2분 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스쳐간 생각에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이야기를 써 나갔다.
어린 딸의 부탁으로 우유를 사러 마트에 간 아빠가 그곳에서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를 만난다. 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쇼핑 카트로 호랑이를 제압한 그는 미디어를 타고 화제의 중심에 떠오른다. 그러나 어린 딸에게 호랑이는 만화 속에 존재하는 무해하고 귀여운 동물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호랑이를 잡았다고 자랑하던 아빠는, 시민의 영웅이 된 동시에 딸에게는 천하의 몹쓸 악당이 되고 만다.
대충 이런 이야기. 따지고 보면 호랑이가 주인공도 아니고, 어디선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제멋대로 조합한 조악한 이야기였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창작한 이야기에 아이러니한 정서까지 결말에 담았다는 게 스스로 기특했다.
어쨌거나 면접은 무사히 끝이 났고, 나는 시원섭섭한 마음을 안고 부산행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하루 뒤, 면접을 봤던 과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출근하실 수 있나요?”
더블 합격. 무탈한 삶에 고난과 역경의 서사가 조금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은 내게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감사하게도 두 회사 모두 나를 좋게 봐주신 듯했는데, 면접 때 나눈 대화로 짐작해 보자면 지금껏 내가 영화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도 꽤 긍정적인 방향으로 어필이 많이 된 것 같다.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내가 지금껏 먹고 사는 문제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영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으며 살아온 게 아닐까 하며 착잡한 마음으로 삶을 돌아보곤 했었다. 하지만 연이는 면접 합격 소식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렇지,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니었지.’ 새삼 그렇게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