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집안일을 대강 마쳐놓으면 식구들은 어느새 각자가 제자리로 돌아가있다. 아이는 남은 숙제를 하거나 친구와 놀러 나가고, 남편은 밀린 일을 하느라 컴퓨터를 다시 켰다. 평일에는 자주 있지만 주말에 혼자 놀 시간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행주로 말끔하게 훔쳐낸 식탁에 앉아 혼자 놀 아량으로 다기 몇 구를 예쁘게 차려본다. 지난가을 강서성 경덕전에서 사 온 개완과 달빛색의 사기 잔을 놓고 물이 끓는 동안 마실 차를 고르는 일에서 새삼 분수에 넘치는 기분을 느낀다. 입맛에 맞게 구비해 둔 각종 찻잎을 바라보고 있자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배부름이 올라온다. 혼자 노는 시간은 마음의 빈 구석을 채우는 시간이다. 알아채고 가끔 들여다보며 챙겨주어야 내 건강에도 식구들에게도 이롭다.
커피의 카페인은 수면에 방해가 심해 선호하지 않지만 연하게 우린 찻잎의 카페인은 오히려 수면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혀뿌리를 자극하는 뜨거운 찻물 줄기가 식도를 거치며 온도를 낮추고 심장을 좋은 온도로 데운다. 좋아하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 한 편을 틀어놓고 마시기 시작한 차는 그 일부가 수증기로 얼굴에 닿으며 얼굴을 붉히고 종국엔 안팎으로 차에 취하기에 이른다. 나는 정말로 차에 취한다. 몽롱한 정도는 술과 비슷하지만 술이 주는 빠른 흐름과 달리 차의 잔잔한 흐름은 사람을 제대로 홀린다. 차를 마시며 보는 책은 금세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길고 지루한 영화라도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게 하는 차의 힘이 있다.
잎을 우린 첫물은 보통 따라버리기도 하지만, 기분에 따라서는 남겨두기도 한다. 뜨거운 물과 만난 찻잎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면 향기와 맛은 첫물보다 진해지며 본성을 드러낸다. 본성을 드러내기 전의 순둥한 얼굴을 남겨 놓은 것이다. 두세 번째 우릴 때 만발한 꽃 같던 차는 다섯 번쯤부터는 시들어가기 시작한다. 시들어가는 차의 맛은 물 맛을 진하게 남긴다. 그때를 대비해 따로 담아두었던 첫물을 다시 가까이 가져온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 후회도 남고 회한도 있다. 거기에 남은 억울함 비슷한 감정을 찻잎으로라도 이뤄보려는 보상 심리가 무의식 중에 발동한다. 그 사이 차갑게 식은 첫물이 지나간 청춘의 향취를 되돌려 낸다. 물맛과 가까울 정도로 엷어진 찻물의 흐려져가는 힘은 첫물에서 피어나지도 않은 채 엷게 드러나있었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여린 찻물과 다 우려내고 남은 찻물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처음 우려낸 여린 찻물에는 용기와 힘과 야망이 숨어있고 식은 찻물일지라도 식지 않은 그 무언가가 가득했다.
구강 안의 치아를 포함한 모든 구조들과 침이라는 소화액이 찻물을 대하는 반응이 제각각이다. 혀끝을 아릿하게 하는 떨떠름함이 목구멍에선 잔향을 남기며 미끄러지기도 하고, 난蘭향과 우유향의 미묘한 배합이 혀 밑 침샘을 자극하여 배고픔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혀는 물론이고 볼 안 쪽 벽면에 부딪히고 혀로 들어 올려지며 코로 뿜어지는 동안 풍부해지는 향을 어떻게 칭할까 적합한 형용사를 찾기 어렵다. 이것은 글을 쓰면서도 자주 겪는 현상인데 나만 아는 것을 얼마나 가시적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감상평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따라서 이런 미묘한 것들을 탐미하고 나누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엄청나게 설레는 일이 된다.
차를 좋아하는 이들이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바쁜 학과 공부에도 이따금 차실茶室에 동반해 주곤 하는 딸아이를 이번에는 대동하였다. 어른들의 모임에 어색해하던 딸아이는 예상되는 심심함을 미리 걱정했다.
"가서 무슨 이야기하고 놀아?"
"차 이야기 하면서 놀지. 혼자마실 때는 알지 못하는 것들을 함께 마시면서 알게 되는 재미가 있어."
색색의 다과와 디저트를 준비한 주인장의 정성이 오늘도 빛났다. 기다랗게 배치된 차탁에 앉아 그간의 안부를 묻는 얼굴에 차 마시는 이들의 공통된 표정을 읽어낸다. 은은하고 편안하게 번지는 미소가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면서 주전자는 잔을 채워갔다. 중국 고유 문양의 식탁보와 찻잔에 수공으로 그려 넣은 한자를 감상하는 것도 차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여 부족함 없이 감상했다. 차향이 희미하게 퍼져있는 공간의 냄새를 맡았고, 우리 간에 오가는 잔잔한 공기의 대류를 살갛에 느꼈다.
차를 마실수록 쉽게 찾아오는 허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 점심을 단단하게 먹는 준비를 마쳤다. 공복에 흘려드는 차가 몸으로 흡수되는 속도에 주저함이 없는 이유로 어떤 이는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주인장의 손끝이 우리의 준비상태를 감지하고 주전자에 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카페인에 미약한 딸아이를 위해 끓인 맹물과 과일을 더 가져다 놓았다. 홀짝홀짝 마셔보는 아이의 조그만 입술이 귀엽다. 첫 모금을 목젖으로 밀어 넣고 난 다음, 한 박자의 정적이 흐르고 나면 맛에 대한 의견이 이곳저곳에서 마구 쏟아진다. 이때부터는 형용사 싸움이다. 누구의 형용사가 더 그럴듯한 지 먼저 알아채는 자와 그에 공감하는 이들의 끄덕임이 찻물을 계속 들이키고 있다. 같은 차일지라도 잔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참 묘한 일이다. 넓은 주둥이에서 넓게 퍼졌던 향은 좁은 잔에서 좀 더 밀도 있는 향이 되었다.
다양한 묘사에 귀 기울이며 혀 끝의 맛을 정의하는 시간이 예정된 세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애초에 차 이야기 하면서 보낸다던 시간은 정말로 차 이야기만 하면서 끝이 났다. 차나무 잎이 자라온 환경과 차의 가공법, 그리고 수많은 변수들이 만들어내는 개성이 제각각이다. 때문에 누렇고, 푸르고, 검고, 붉기도 한 찻물을 가지고 노는 이들의 시간은 끓이고 우리고 따르는 동작의 반복을 기껍게 해낸다.
차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차에 관한 지식을 두루 갖추고 있다. 식후 혹은 식전의 차 테이블에서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차에 관한 지식의 방출은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차에 진심인 이들은 자신의 차와 찻잔을 가는 곳마다 휴대하기도 하는데, 식당에 갈 때에도 자신의 차를 잊지 않고 챙겨간다. 코르크 차지를 내며 집에서 들고 온 질 좋은 와인을 마시는 서양 문화와 비슷하게 중국인은 자신의 차로 찻물을 내려달라 요청한다. 이는 미안한 것도 아닌 지극히 일반적인 것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차를 다른 이와 나누고 좋은 건 함께하면 배가 되는 미학을 아는 이들의 생각이 녹아든 행위이다. 차가 우러난 주전자를 회전 식탁의 한가운데에 올려놓고 차에 대한 이야기는 대화를 시작하는 훌륭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차를 마시는 이가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 각자의 차 품평회가 당연스럽게 이어진다.
차를 마시며 얻는 이득을 생각하던 중에 엄청난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마셔본 차가 많아질수록 마셔볼 차가 더 많아지는 역설을 말이다. 오늘 마셔본 '야래향'이라는 차의 향이 야래향 꽃의 향에서 나온 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달빛 아래에 앉아 입에 머금은 한 모금이 밤에만 피는 꽃(야래향)을 떠올리게 했음은 분명하다. 좋은 차를 구분하는 제일의 기준은 아무래도 미각에 있지만, 차가 담고 있는 이름과 기운은 그 미각을 후각으로 통각으로 뻗어가게 한다. 달빛의 맛은 몰라도 고요한 밤의 향기가 달빛과 닮았을 것을 짐작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거친 손으로 고온에 빠르게 덖어 빠르게 원하는 맛에 도달한 차의 또렷한 불향과 은근한 열에 오래 덖어 숨겨진 듯 여리게 남아있는 불향의 섬세함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몇 해 묵은 우롱차 '육계'를 주인장의 올해 '육계'와 대조해 보았을 때, 건잎의 냄새만으로 오래된 것을 단번에 꼬집는 주인장의 훈련된 감각 앞에서 입안의 교만한 혓바닥이 그간 무엇을 칭송하고 살았는지를 깨닫는다. 차 좀 마셔봤다고 자부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미개발된 감각의 평면을 채우려는 시도는 깊이의 부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결국 그 미개발 구역을 입체적으로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